[ The Economist 본사독점전재 ]

한국의 경기는 현재 상승세다.

인플레이션 조짐도 없다.

그러나 한국의 금융시장은 다시 한번 위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은 한국 최대 재벌인 현대 문제다.

현대의 창업가족에게 4백60억달러(52조원)에 달하는 부채를 줄일 의지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채권단은 지난달 26일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현대건설과 상선에 대해 단기 차입금의 만기 연장을 거부했다.

이날 현대 계열사의 주가하락으로 종합주가지수는 6%나 하락했다.

현대는 정주영 명예회장 등 3부자 퇴진과 함께 기업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지만 한국의 금융 시스템 전체는 이미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한국 금융위기설의 근저에는 투자신탁회사의 부실문제가 버티고 있다.

한국의 재벌은 투신사와 교차소유 관계에 있어 투신사가 무너지면 재벌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문제가 된 현대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지난 97년 은행 위기로 많은 시중자금이 몰린 투신사는 1년만에 운용자금을 두배 이상으로 불렸다.

신주 발행을 통해 차입금도 줄여나갔다.

97년 이후 은행 구조조정에 맞물려 재벌들은 은행 대신 투신사를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투신사들은 그후 부채가 더 늘어났다.

투신사의 부실은 은행과 재벌 모두에 부담을 줬다.

재벌과는 교차소유로 얽혀있고 은행은 이들의 대주주이기 때문이다.

투신사의 투자 및 대출금은 어디로 흐르는지 불투명하다.

한국의 경제는 모두 같이 살거나,또는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 정부는 애초에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에 8조원을 투입,부실투신사 모두에 긴급 자금을 지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현대 등 다른 투신사들에는 강경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정부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투신사에 대한 시장의 신용은 썰물 빠지듯이 사라졌다.

올 4월까지 9개월 동안 84조원의 투자자금이 투신사를 빠져나갔다.

이에 따라 재벌은 투신사에서 돈을 빌리기가 어렵게 됐다.

재벌에 대한 대출 규모를 축소하고 있는 은행을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절망적인 투신사가 보유주식을 대량매각하면서 종합주가지수는 올들어 30%나 하락했다.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이 한국의 취약한 금융시장을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한국의 외환위기가 반드시 재현된다는 것은 아니다.

97년 외환위기는 외환표시 단기 부채가 원인이었지만 은행과 재벌은 이미 상당부분을 상환한 상태다.

게다가 지난 2년 동안 경상수지는 큰 폭의 흑자를 기록했다.

정부의 외환보유고도 튼튼하다.

그러나 수요가 증가하면서 수입이 늘고 있어 흑자시대는 막을 내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국이 곧 순수입국이 되며,견실한 금융시스템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의 경제 개혁으로 자금줄이 묶여 있는 상태다.

이미 경제개혁에 1백조원을 썼다.

앞으로 30조원을 더 투입하겠다고 했지만 전문가들은 이 금액이 투신사의 구조조정에 턱없이 모자란다고 보고 있다.

예산확보에 대한 국회의 동의도 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정부가 우물쭈물하다가는 투신문제는 경제전반에 더욱 심각한 타격을 가할 것이다.

정부는 재벌 개혁에 더 엄격한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한 간부가 지적한 대로 현대투신 하나만으로도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이 되기 때문이다.

정리=정지영 기자 cool@hankyung.com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6월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