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숙 <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이 먹고 자는 것은 원시시대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일중의 하나다.

그러나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자는가는 세월에 따라 바뀐다.

개인적으로는 변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변하지 않는 것 역시 좋다는
생각이다.

새천년 벽두에 나는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변치않고 살련다"라고
다짐해본다.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는 내 자신의 좌우명을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감사와 더불어, 감사하며, 감사를 받을 생각을 하며 살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할 만한 얘기다.

조금 긴 사설이긴 하지만 차근히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고양이나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반평생을 이어온 결혼생활 동안 집안에서 개를 키운 적은 단 한번 밖에
없었다.

고양이를 키운 일은 더더욱 없다.

한번 키워봤던 강아지 이름은 "뽀삐"였다.

왜 "뽀삐"란 이름이 붙여졌는지 지금도 모른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강아지를 준 사람이 이름을 미리 붙여준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뽀삐를 일주일 정도 집에서 길러보다 다시 돌려보내고 말았다.

집안에서 개를 키운다는 것이 내 취향에 맞지 않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법"이란 옛말을 생각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내가 다시 개를 키우게 된 것이다.

아들 딸 모두 출가시키고 나니 집안이 쓸쓸하기 그지 없어서였다.

직장 동료 한사람이 이런 상황을 알고 강아지 한마리를 전해줬다.

이번에는 강아지를 준 사람이 이름을 미리 붙이지 않았다.

옛날 생각이 나서 나는 아내에게 "뽀삐"라고 부르자고 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즉각 "안돼요, 너무 상투적이에요"라고 반대했다.

그리고 나선 "오늘 퇴근 길에 이름하나 지어오세요"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나는 아내의 "상투적"이란 말을 떠올리며 고민하던 끝에 강아지 이름을
"감사"라고 짓기로 했다.

아내도 내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나는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야지"란 말을 자주 한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직 철이 덜 든 탓에 매번 되뇌이는 말이다.

"일이 잘 될 때에는 잘 돼서 감사하고,일이 잘 안될 때는 잘 안돼서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잘 되지 않은 일에 어떻게 감사해야 하나"라고 누가 물으면 "지금 잘 되지
않은 것이 나중에 가서 결과적으로 잘된 일인 경우가 있다"고 답해준다.

너무 빨리 출세한 사람이 마지막에는 내리막을 걷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 보게 된다.

욕심 때문에 망하는 사람 역시 주변에 너무 많다.

속된 말로 한 때 잘 나가던 사람의 몰골이 순식간에 말이 아닌 경우도
신문에서 매일 본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갈 때 더욱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세상 이치를
거스른 탓이다.

오히려 일이 잘 안풀렸으면 더 나았을 경우들이다.

나는 출근할 때마다 "오늘도 감사해야지"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퇴근 길에는 그런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아침이고 저녁이고 항상 감사하면서 살려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이름을 "감사"라고 지으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것이다.

아내는 "그것 참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강아지 이름으로는 어색한 감도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부르면 이름이 되는 거죠, 뭐"라며 반겨했다.

"감사(感謝)"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가 또 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감사(監査)를 받을 때가 있다.

감사를 처음 받을 때는 불쾌하다.

하지만 감사를 정기적으로 받아야만 일을 태만히 하지 않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간에 항상 감사를 받을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하자는
것이 나의 생활신조중 하나가 됐다.

물론 그런 생각을 쉽게 잊어버린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잊지 않으려면 아침 저녁으로 만나게 될 강아지의 이름을 "감사(監査)"로
지어놓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앞의 감사(感謝)는 "감"자를 길게 발음하고 뒤의 감사는 짧게 발음하게
된다.

음의 장단만 있고 발음은 같은 데 이렇듯 의미가 상반된 단어도 별로 없을
것 같다.

긴 감사와 짧은 감사를 조석으로 읊으면 내 삶이 결국 훌륭한 삶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래서 때로는 긴 감사, 때로는 짧은 감사를 번갈아 부르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러다 보니 삶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잘 되도 좋고 잘 되지 않아도 좋으니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서두에서 "감사와 더불어, 감사(感謝)하며, 감사(監査)를 받을 생각을 하며
살련다"라고 말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누구에게나 변치 않고 살아야 할 대목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