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 < 성균관대 교수. 미국 아메리칸대 초빙교수 >

우리나라 외환 보유고는 적정한가.

정부는 최근 우리나라 가용 외환 보유고를 연초 3백억달러 수준에서 연말
까지는 5백억달러로 늘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혹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제2의 환란에 대비한 조치라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작년 11월 우리나라를 엄습한 제1의 환란은 우리나라 경제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 외국투자자들이 자금을 일시에 빼간데서 비롯됐다.

물론 우리나라 외환위기는 작년 7월에 시작된 동아시아 위기와 연관이 없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우리 경제의 경쟁력 약화, 정부의 무능, 그리고
사실상의 고정환율제도 때문이었다.

환란이란 작년 우리나라가 겪었듯이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고갈되고 환율이
연일 폭등함으로써 외환시장이 마비상태에 이르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또다시 우리나라에 발생할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은 아직도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일본과 중국의 환율도 불안하다.

특히 중국이 대규모 평가절하를 감행한다면 아시아 전체 외환시장과 금융
시장은 엄청난 몸살을 앓을 것이다.

최근에는 러시아까지 파산상태에 있기 때문에 과거기준에 의하면 제2의
환란이 발발할 조건들이 적지않게 조성돼 있다고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완전 변동환율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외환
보유고가 작년처럼 급속도로 고갈될 수는 없다.

외국투자자들이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자본을 회수할
경우 환율이 급등할 것이기 때문에 급격한 자본회수가 제어된다.

견딜만하면 환율이 다시 안정되기를 기대하면서 자본회수 시기를 늦추려 들
것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변동환율제만 그대로 유지된다면 작년처럼 외환이
고갈돼 여기저기 꾸러 다니는 상황은 전개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환율급등은 작년과 같이 원자재 수입을 중지시키고 외채상환 부담을
가증시켜 우리의 힘든 살림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최대현안은 우리 경제에 대한 대외 신인도를 작년
IMF 구제금융시기 이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물론 우리나라 외환 보유고를 늘리는 것도 대외신인도를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에서 비싼 이자로 차입해 싼 이자를 받고 예치은행에 쌓아두는
것에 그친다면 그만큼 이자 부담만 늘어난다.

한나라의 외환 보유고는 다다익선이 아니다.

외국 금융인들이 납득할 정도의 수준이면 족하다.

IMF가 보는 적정 외환 보유고는 석달치 수입액 정도이다.

그러나 IMF의 이러한 전통적 기준은 수입과 수출의 시차에서 발생하는 외환
캐시 플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외채가 많은 나라, 특히 단기 외채가 많은 나라는 더 많은 외환을
보유해야 한다.

단기 외채 비중이 급격히 늘어났음에도 당국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작년에 더욱 심각한 외환 고갈 문제를 겪었다.

80년대 초 멕시코가 외채 위기를 겪었을 때, 우리나라의 단기 외채 비율은
22%수준에 불과했다.

이 수치는 지난 97년 중반 이후 60%수준으로 치솟았고 단기 외채 규모가
거의 7백억달러 수준에 육박했다.

외국인들은 우리 정부의 위기 대처 능력을 의심한 순간부터 앞다투어가며
자본을 회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외환보유고를 단기 외채 규모만큼 늘릴 필요는 없다.

특히 변동환율제도를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외국자본가들에게 우리정부가 외채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고 있으며 위기대처
능력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이면 족하다.

외국투자자들의 우리 경제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금융제도를 바로잡고 금융기능을 하루속히 정상화시켜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금융개혁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단 마음먹은 대로 꾸준히 지속해야한다.

우리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도 문제지만 정부 능력은 더욱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관료사회의 의식개혁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환란 대비를 외환보유고 증대에서 찾으려는 식의 접근방식은 또다른 외환
위기와 경제 파탄을 언제라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