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 소설가 >

김대중 대통령은 8월15일의 연설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
그의 기본적 경제 정책임을 다시 확인했다.

일단 그럴듯하게 다가오는 구호다.

그래서 그런지 김 대통령의 취임 연설에서 처음 밝혀진 뒤 대체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아쉽게도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기본정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았으며 구체적 프로그램들로 채우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기본적 정책은 또렷이 설명돼야 하며 되도록 빨리 구체적인 프로그램들을
낳아야 한다.

비록 자명해 보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장경제를 떠받치는 이념은 경제적 자유주의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은 우리 사회의 기본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가.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고 개인들에 대한 사회적 강제를
되도록 줄여야 한다는 이념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들이 사회적 의사 결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념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사회적 의사 결정의 내용에 관한 이념이며 민주주의는
그 절차에 관한 이념이다.

그 둘은 보완적이며 자유민주주의와 같이 유기적으로 결합됐을 때 비로소
제대로 구현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은 절차에 관한 이념인 민주주의와 내용에
관한 이념인 경제적 자유주의를 병렬했다는 점에서 일단 낯설고 비효율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굳이 그렇게 표현한 사정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나오는 것이 옳다.

하긴 김 대통령의 취임 연설엔 그런 사정의 한 자락이 드러났었다.

"민주주의의 발전없이 시장경제만 추구하면 파시즘에 이른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렬한 배경엔 아마도 그런 역사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관은 비정통적 견해다.

파시즘은 민족이나 국가를 인류의 기본적 단위로 여기는 전체주의 이념이다.

반면 시장경제는 개인들에게 가장 큰 자유와 책임을 허여하는 경제 체제다.

정통적 견해는 시장경제가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대해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그런 역사관을 지지한다.

파시즘이 위세를 떨쳤던 20년대와 30년대에 시장경제를 추구해서 파시즘을
불러들인 나라는 없다.

실은 미국이나 영국처럼 파시즘의 위험을 잘 극복한 나라들은 할결같이
발전된 시장경제 체제를 가졌다.

반면 일본 이탈리아 독일처럼 아예 시장경제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거나
악화된 재정으로 시장경제가 흔들린 나라들은 거의 모두 파시즘에 굴복했다.

시장경제에 적대적인 단체주의(corporatism)가 파시즘의 공식 이념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최근의 경험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사이의 그런 관계를 또렷이 보여준다.

압제적 정권이 다스린 나라들 가운데 시장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나라들로 우리나라를 비롯 필리핀 칠레 대만 싱사포르, 그리고 태국과 같은
국가들을 꼽을 수 있다.

이 나라들은 차츰 성공적 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다.

반면 시장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한 나라가 민주주의를 누린 경우는 아직
없다.

현 정권의 그런 비정통적 역사관은 어쩔 수 없이 시장경제에 대한 편견을
낳았고 그런 편견은 경제 개혁에 줄곧 그늘을 드리워왔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에 대한 설명과 구체적
프로그램들의 제시를 통해서 현정권이 경제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를
받는 일은 중요하다.

이 일을 시급하게 만드는 사정은 또 있다.

병행 발전의 한 축인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통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정부 개입은 비판하기 어렵기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명찰을 단 "트로이 목마"를 경계하는 일은 긴요하다.

이번 현대자동차사태에 노동부장관과 집권당 국회의원들이 개입해서
시장경제의 틀을 무너뜨리고 경제 개혁의 핵심 조치를 무력화시킨 일은
그런 경계가 한가로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