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근 < 인천대 교수.무역학 >

동아시아 외환금융위기 발발 이후 국제적으로 그 원인과 대책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크게 대별하면 세가지의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동아시아제국 발전모델의 근본적인 결함으로 인해 위기가 발발했다는
"내부결함론", IMF의 위기대응방식이 과도하여 위기를 확대.심화시켰다는
"IMF 역할재정립론", 그리고 핫머니의 광폭성과 같은 새로운 현실에 의해
위기가 발생했다는 "외부적 조건론"이 그것이다.

내부결함론의 핵심은 지난 94년 MIT대 폴 크루그만 교수가 개진한 아시아
성장한계론이다.

그는 동아시아의 성장이 지적인 능력 혹은 생산성의 증대에 기인한 것이
아니므로 향후 성장속도가 크게 감퇴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IMF는 동아시아의 외환위기가 폴 크루그만의 주장이 현실화된 것으로 보고
포괄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IMF의 포괄적인 구조조정 요구는 전통적인 IMF의 역할범주를 크게
넘어서는 것이다.

이를 가장 강력히 비판하고 나선 것은 하버드대의 마틴 펠드스타인
교수이다.

그는 위기발발 전 동아시아제국, 특히 한국의 경제사정이 전면 개혁을
요구할만큼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IMF의 혹독한 구조조정 요구로 인해
오히려 위기가 증폭되었으므로 IMF의 위기대응방식과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비교적 수월하게 무마될 수 있었던 단기적 유동성 부족사태를 마치 경제
전반에 걸쳐 모순과 결함이 심각한 것으로 오도했으며 이를 기화로 그간
미국이 동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불만 및 주문사항을 일거에 해결하려는
접근방식을 취했다는 비판이다.

역시 하버드대 교수인 제프리 삭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동아시아
제국의 내부적인 결함만으로는 외환시장의 급격한 붕괴현상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현행 국제금융체제에 어떠한 문제점이 없는지 짚어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삭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동아시아의 외환위기가 전적으로 내부적인 결함에
의해 유발된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구조의 외부적 조건이 작용했는가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외부적 조건론의 골자는 80년대 이후 초국적 투기자본의 이동이 광폭화
됨으로써 세계 각국에 외환위기가 빈발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핫머니의 광폭성이 국제금융의 새로운 현실로 대두되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금융자본이 세계적으로 축적되었고, 금융시장의 글로벌한 통합으로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게 되었고,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그 이동이
광속화.군집화했다.

이른바 자본.시장.기술을 3대 축으로 하는 삼각구도가 형성됨으로써
위기발생이 구조화된 것이다.

여기에 두가지의 환경여건 변화가 가세했다.

변동환율제 이행에 따른 외환시장의 투기장화와 미국의 패권에 의해
지지된 "폴리티컬 머니=달러"이다.

외부적 조건론의 성립은 대단히 중요한 정책적인 함의를 갖는다.

현재 우리나라에 적용되고 있는 IMF개혁프로그램은 철저히 내부적 결함론에
입각해서 위기당사국이 모든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외부적 조건론이 인정된다는 것은 오로지 위기당사국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므로 책임분담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준다.

책임분담론의 관점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위기당사국들은 세가지
차원에서 국제적인 정책협조를 요구할 수 있다.

포괄적 구조조정의 당위성을 위주로 IMF프로그램을 재검토하는 것,
획기적인 달러절하-엔절상의 환율조정을 목표로 미국과 일본의 적극적인
공헌을 촉구하는 것, 그리고 도덕적 해이에 빠질 우려가 높은 채권은행들을
상대로 채무탕감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울러 외부적 조건론의 성립은 핫머니의 광폭성이라는 새로운 현실의
대두를 인정하는 것이므로 선진제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시장개방논리를 다소
후퇴시키는 방향에서 이를 직.간접적으로 규제하는 방안을 국제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투기적 외환거래에 대한 과세(일종의 토빈세), 지역단위의
핫머니 규제기금 창설, 단기 투기자본에 대한 칠레식의 몰수방안 등이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정책과제는 국제적인 역학구도에 비추어볼 때 개개의
위기당사국 차원에서 풀어가기 어려운 과제들이다.

따라서 위기에 처한 동아시아제국은 금융주변국이라는 제약을 극복하고
국제금융의 새로운 질서 형성에 독자적인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상호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 정부차원에서는 채무국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대변하는 서울
라운드의 추진을 검토해야 하며, 민간차원에서는 관련국 NGO들을 규합하여
국제적으로 여론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수행해봄직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