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북한산 산행길에서 K교수는 "춘향전금서론"을 내세워 동행했던
사람들이 모처럼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한국인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과거에 장원급제만 하면 권세는 물론
부귀영화를 누리고 헤어졌던 연인까지 되찾아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구성된 춘향전의 줄거리를 머릿속에서 속히 지워버려야 한다는
것이 K교수의 논리였다.

농담처럼 내뱉은 이야기였지만 대학에 입학하기가 무섭게 고시공부에만
열중하는 젊은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교수의 심경을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것 같기도 했다.

우리 전통적 가치관의 가장 큰 결함은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빛내겠다"는
양반계급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가족적 이기주의였다.

그리고 이같은 이기적 생각은 자칫 잘못하면 부정과 부패로 이어질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사람의 씨가 따로 있는 것처럼 여겼던 문벌
의식과 신분제도가 없어져 입신양명을 위한 경쟁기회가 모두에게 개방되기는
했지만 일신의 영광만을 노리는 가족적 이기주의는 여전히 우리의식속에
깊숙히 뿌리박혀 있다.

과거에 급제해 권좌에 오르고 부귀영화를 누리려던 옛 사람이나 사시에
합격해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어 일신의 영광을 얻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박완서의 장편소설 "도시의 흉년"에는 지금도 우리 의식속에 남아 있는
전통적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지대평과 김복실은 시장에서 포목장사로 벼락부자가 된 부부다.

이들은 사법고시에만 합격하면 권세와 돈을 함께 따른다는 통속적 생각에
따라 법관 시보인 서재호를 큰 딸 수희의 "일등신랑감"으로 결정한다.

과부의 외아들로 가난한 집안출신인 맏사위를 위해 지대평부부는 "일등
신랑감"에 걸맞게 값비싼 혼수도 해주고 집은 물론 부동산까지 한밑천
떼어준다.

여기서 서재호가 수희를 배우자로 선택한 동기를 보면 놀라지 않을수 없다.

정의의 수호를 임무로 삼는 법관이 되려면 부정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가 부자집 딸을 아내로 맞아야 하는
이유다.

더 놀라운 사실은 수희도 서재호의 타산적 속셈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돈만 있다 뿐이지 어디 가문이 있나. 딸애 덕에 우리가 가문을
얻었지..."

이 대화에서 보듯 김복실여사의 의식속에는 아직 전통적 가문의식과
관존민비의 생각이 엿보인다.

능숙한 필치로 그려진 이 우리사회의 아픈 이야기 속에서는 결혼에도
문벌이 중시됐던 옛날과는 달리 금전이 더 중시되는 배금사상은 찾아볼수
있다.

특히 서재호에게는 금전 그 자체가 목표가 되고 있다.

비판을 받아 마땅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선왕조는 도덕
관념이 강조되는 윤리적 사회였다.

양반계급에 속해 있으면서도 벼슬을 마다하고 지조를 지켜가며 청렴결백하게
살면서 나라가 위태로울때는 앞장서 나섰던 선비들이 많았다.

500년 조선왕조를 지켜온 것은 바로 이 선비정신이었다.

지금은 서구문물에 밀려 이 선비정신도 사라진지 오래다.

요즘 "법원도 썩었다" "법관조차 믿을수 없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는
것을 보면 정의의 수호자인 법관들의 직업윤리도 흔들릴수 밖에 없는 모양
이다.

의정부지원 판사들의 금품수수비리의혹 사건이 발생한 이후 사법부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의정부 지청의 검사들도 수사를 받았으나 변호사에게 사건을 소개해준
대가로 향응이나 돈을 받은 물증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법관을 못믿게 된 판에 검사는 믿을수 있는지 아리송 하기만 하다.

"한국 법조인의 사표"로 추앙받고 있는 가인 김병로선생은 구한말 거유인
간재 전우 아래서 한학을 부했고 최익현의 의병에 가담해 항일운동도 벌였던
참 선비였다.

1953년 가인은 "법관의 도"라는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법관이 일반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법관으로서는 최대의 명예
손실이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명예 실추는 법관 전체의 명예실추가 될
것입니다. 법관은 양심과 이성을 생명처럼 알아야 하며 이를 굳게
지킴으로서 법관된 책임은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또 항상 "법관까지 돈을 먹으면 나라가 위태롭다"면서 세상 사람이
다 부정의에 빠져간다 하더라도 법관 만큼은 정의를 최후까지 사수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1954년 9월 당시 서울지방법원장 김모 법관이 변호사로부터 사건청탁을
둘러싸고 45만환을 받은 사건으로 구속됐을때 가인이 남긴 말은 바로
오늘날의 법관들을 질타하는 소리처럼만 들린다.

"사법관으로서의 청렴한 본분을 지킬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야 합니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