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근 < 과학정보통신부장 >

미국의 앨 고어 부통령은 21세기 정보화사회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로
꼽힌다.

그는 부통령이지만 적어도 정보통신분야에 관한한 대통령이나 마찬가지다.

클린턴 행정부 출범과 함께 침체된 미국의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그는
정보통신산업 진흥에 발벗고 나섰다.

미국이 80년대의 불황을 떨쳐내고 고속성장의 신부흥기를 맞은 것도 그의
이같은 정보기술(IT)분야의 벤처산업 육성 노력에 힘입은바 크다고 하겠다.

금방 미국을 따라잡을 것 같던 일본은 IT에서 밀려 세계 경제계에서 다시
미국의 먼발치로 물러나야 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도 정보대국을 목표로 멀티미디어 슈퍼 코리더
사업을 진두지휘,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우리의 경쟁국인 싱가포르 대만 인도 등도 나름대로 정보화플랜을 갖고
21세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 국가들 모두 최고 통치권자들이 뚜렷한 정보화 철학과 열정으로 이
분야 산업발전에 매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현재 최고 지도자를 꿈꾸는 대선후보들은 12월 대선을 겨냥, 정보통신정책
공약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신한국당 이회창, 국민회의 김대중, 민주당 조순, 국민신당(가칭) 이인재
후보 등이 공약 또는 토론회를 통해 정보화를 정책의 우선순위에 둘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 또한 외국의 지도자들처럼 정보통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는듯 해
일단 환영할만 하다.

특히 연쇄부도와 극심한 취업난, 붕괴위기의 증권시장 등 빈사상태를 맞고
있는 우리경제의 새 돌파구로 정보통신을 꼽고 있어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하다.

후보들은 "2005년까지 세계5위권 정보통신산업 대국 진입을 목표로 기술
자립을 실현하겠다"(이회창) "정보대중화에 기반을 둔 국가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김대중) "학생 1인당 컴퓨터 1대씩 보급하겠다"(김종필) "정보
산업육성을 위해 자족적 정보산업타운을 조성하겠다"(조순) "정보화혁명을
통한 스피드경제를 실현하겠다"(이인제)고 역설한다.

이들의 공약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나라는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든 21세기 정보대국으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화려한 말 뒤에서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공약에는 우선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의 현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결여되어 있다.

기술격차를 어떻게 해소하고, 세계시장에서 우리가 특성화해야 할 분야는
어디라는 뚜렷한 방향이 없다.

"공약이 공약됐다"는 해묵은 말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더 우려되는 점은 이들에게서 정보화에 대한 명확한 철학이나 의지를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공약이라고 내놓은게 단순한 정책의 나열에 그칠 뿐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면 국민들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이 후보에게 원하는 것은 한두가지 정책제시가 아니라 정보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우리 정치 현실에서 대선 후보들에게 정보화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공약은 화려하지만 겨우 컴맹이나 넷맹을 벗어난 수준에다 투사성격의
정치철학이 몸에 배어있는 그들의 입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후보들이 좀더 겸허한 자세로 정보대국 건설을 추진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보화추진에 대한 보다 확실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이를
추진할 강력한 기관을 대통령직속으로 신설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국가차원의 정보화정책을 수립 추진하는 일원화된 기관이
사실상 없다.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정보화추진위원회는 각 부처의 정보화정책을
논의하는데 그칠 뿐이다.

정보화정책도 각 부처별로 분산돼 추진되다보니 통일된 방향설정조차
어려움이 많다.

민간업계의 발전을 가로막는 정부의 지나친 간섭도 여전하다.

대선후보들이 이런 철학조차없이 젊은 네티즌세대의 표를 의식한 또하나의
공약으로 정보화를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경제와 국가는 또한번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