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구 < 도쿄 특파원 >

"엔블록" 형성을 꿈꿔온 일본의 야망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

아시아경제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비중이 점차 약화되고 있을 뿐아니라
엔화의 역할도 뒷걸음질 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욱일승천의 기세로 치솟던 경제활력을 배경으로 곧 아시아 공용화폐
로 자리잡을 것같은 기세를 보였던 엔화이지만 최근들어서는 일본기업들
마저도 엔 베이스 결제를 줄여가고 있다.

미국 유럽기업을 대상으로 한 거래는 물론 일본이 앞마당으로 자부하는
아시아지역에서도 이같은 추세는 마찬가지다.

지난 3월말 현재 일본의 수출중 엔 베이스 거래는 35.9%다.

93년의 42.8%에 비해 6.9%포인트가 줄어들었다.

대동남아시아수출의 경우 93년에만해도 비율이 52.5%에 달했으나 지난 3월
에는 44.1% 수준까지 떨어졌다.

대미지역 수출의 엔베이스 거래도 93년의 19.4%에서 올해는 15.9%로 주저
앉았고 한때 51.5%에 이르렀던 EU(유럽연합)지역 수출에서도 36.1%까지
하락했다.

더구나 일본기업들의 엔 베이스 수출감소는 지난해 급격한 엔고가 진행되던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엔고상황에서는 달러베이스로 수출하면 큰 환차손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일본기업들이 거래수단으로 엔보다는 달러쪽에 높은 비중을
두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같은 상황은 수입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기업들의 엔베이스 수입비율은 지난 93년 20%대에 진입한데 이어 지난해
엔 24.3%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들어선 다시 20.5%로 떨어져 간신히 20%선을 유지했다.

지난해 21.5%를 기록했던 대미지역 수입에서도 17.2%로 급격히 내려앉았고
한때 45%까지 올라섰던 EU지역에서도 40.9%대로 후퇴했다.

94년까지만해도 30%대를 유지하던 대동남아시아지역 역시 23.9%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일본이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아시아지역에서의 엔화거래가 이처럼
큰 폭으로 감소한 것은 엔블록 형성 가능성이 크게 약화됐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지역에서도 달러화가 기축통화로서의 기능을 더욱 강화해가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이는 유럽의 중심국격인 독일의 경우와는 대단히 대조적이다.

독일은 수출상품의 80% 수입상품의 40%가량을 마르크화로 결제하고 있다.

90년대초 노무라연구소는 95년께엔 일본도 수출의 80% 수입의 40%정도는
엔화로 거래할 것으로 내다본 적이 있다.

일본경제의 꾸준한 발전과 엔블록 형성 가능성을 내다본 분석이라고 할수
있지만 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노무라연구소의 예측이 이처럼 크게 어긋난 것은 아시아국가들의 대일경제
의존도가 점차 낮아지고 있는 점에 가장 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NICS(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아세안 4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 중국 등 동아시아국가들의 수출액중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최근들어
13% 수준에 그치고 있다.

10년전인 85년의 17%에 비해 4%포인트가 하락했다.

동아시아국가들이 대일의존도를 줄이게 된 것은 역내교역을 크게 늘린 때문
이다.

이들 국가간의 역내교역은 지난 85년의 26%에서 최근에는 37% 수준까지
상승해 있다.

발전의 원동력을 서로간의 교역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에 힘입어 동아시아국가들은 북미지역에 대한 의존도도 크게 축소시켰다.

동아시아국가들의 수출액중 북미지역이 차지하는 비율은 23%선으로 85년의
29%에 비해 6%포인트나 축소됐다.

이같은 무역구조의 변화와 함께 동아시아국가들이 아직도 일본보다는 미국에
보다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엔블록 형성을 저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최대시장으로서 동아시아국가들에도 일본의 1.7배에 달하는 넓은
시장을 제공해주고 있다.

더구나 미국은 세계를 리드하는 슈퍼파워 여서 동아시아국가들로서는 엔화
보다는 달러화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같은 추세가 동아시아지역에서 엔블록 형성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96년도 통상백서에 따르면 일본은 지난 93년말 현재 동아시아지역에 모두
6백50억달러에 달하는 직접투자를 실시해 85년에 비해 3.4배수준으로 증가
했다.

미국의 3백80억달러 EU의 2백30억달러를 크게 웃도는 규모다.

더구나 94년및 95년에도 90억달러이상씩을 이 지역에 투자하고 있다.

이같은 투자액은 이들 국가가 받아들이는 전체투자액의 약3분의 1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이 지역에 일본기업들의 현지공장이 그만큼 넓게 퍼져 있음을 뜻한다.

특히 일본국내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전자제품들은 현지생산이 급격히 진전돼
이들 국가에서 기간산업화한 예도 많다.

일본 전체생산중 컬러TV는 80% 스테레오와 전자레인지는 70% VTR는 50%이상
을 현지생산이 차지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경우는 일본계기업에 전체수출의 10~30%정도를 의존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같은 점은 일본이 동남아지역에서의 기계류부품 수입을 크게 늘리고 있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난 88년의 경우 일본이 동남아지역에서 들여온 기계류부품은 전체의 26.3%
에 머물렀으나 지난해엔 45.6%로 2배 가까운 수준으로 늘어났다.

현지생산한 제품이 일본으로 역수출된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현지에 진출한 기업들은 재투자도 활발히 실시하고 있어 일본기업에
의한 실제투자액은 더욱 커진다.

통산성이 일본현지기업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앙케트조사에 따르면 현지일본
기업들은 아세안국가에서는 전체투자의 68.6%, NICS에서는 74.5%를 현지투자
로 충당하고 있다.

현지경제에 미치는 일본기업들의 역할이 국가간 자금이동에 나타난 단순수치
를 크게 웃돌고 있다는 이야기다.

일본의 수출액중 동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율도 최근엔 40%를 넘어서 85년의
24%보다 크게 늘어났다.

동아시아국가들의 경제력이 크게 증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일본이 역내
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음은 부인할수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동아시아지역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여진다고 할경우 일본이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것임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일본은 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매년 1백억달러이상에 달하는 ODA
(정부개발원조) 자금을 제공해 아시아와의 관계를 깊게 하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지역에서 엔블록이 형성되는데는 여러가지 장애가 도사리고
있다.

우선 각국의 경제발전단계도 너무 다르고 유럽이나 북미지역들과는 달리
각국간 문화적 차이가 크다.

더구나 역내국가들중 아직도 거센 반일감정을 가진 국가들이 적지 않아
엔블록의 형성을 경제판 대동아공영권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엔블록 형성문제와 관련해서는 일본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일본정부로서는 전후처리 등의 문제를 깨끗이 처리해 아시아국가들의 반일
감정을 추스리는 것이 무엇보다 기본적이다.

엔화의 유통을 확대시키는 것도 빼놓을수 없는 과제다.

이와 관련, 노무라종합연구소는 일본정부에 2가지를 제언하고 있다.

첫째는 아시아국가들이 엔화를 원활히 조달운영할 수있는 시장을 정비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하면서 나라가 발행해 신용이 높은 TB(재무성증권) 등
단기국채시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둘째로는 엔화의 해외공급을 늘리기 위해서는 시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방해 아시아국가들에 보다 넓은 수출시장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노무라연구소는 일본이 이같은 개방정책을 취하지 않을 경우 엔블록 형성은
고사하고 금융.자본시장의 공동화가 더욱 진전돼 엔화의 주력거래시장조차
싱가포르나 홍콩 등 해외금융센터에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