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 고려대 교수 / 영문학 >

지난번 선거는 다음번의 대통령 선거에 대한 조짐이 될수 있다는 점 이외
에는 별다른 쟁점이 없는 선거라는 인상을 주었다.

쟁점이 부각되지 아니한 것은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들을 선거에서 물어볼수 있는 쟁점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정당들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은 국민들이 문제있는 사회를 당연한 인간조건으로
받아들이게 길들여져있는 결과라고 할수도 있다.

전직 대통령들의 엄청난 독직을 들추어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사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권력의 측근자가 수십억의 돈을 받아
챙기는 일이 명절에 떡해 먹는 일 정도의 일로 처리되니, 쟁점없는 정치의
바탕이 잘 다져져 있는 것이라고 할것이다.

민주화 투쟁의 열기가 수그러지게 된 다음에 마음을 흥분하게 하는 이슈가
사라진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것은 영웅적 침해행위이고,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영웅적 투쟁이다.

그러나 관행이 된 불의는 영웅적 흥분을 일으키지 못한다.

익숙한 금전상의 부패는 습관이고 제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는 것은 이러한 제도 속에서이다.

새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그들의 포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충실한
분과위원회 활동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생각한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영웅적 투쟁만이 아니라 생활의 제도를 정비해 가는 것이 오늘의 일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일 것이다.

국회의원은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법을 만드는 사람이다.

정치를 한다고 하여도 법을 통하여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
이고 그것에 장인의 정성과 기량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국회에서 법제정이 커다란 토의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그 법이 정치권력의 쟁취 또는 구성에 관계되었을 때이다.

다른 법들,이를테면 국민의 생활에 관계되는 법은 검토도 되지 않은채
회기말에 한번에 무더기로 통과된다.

그러나 보통시민의 삶이란 이러한 법들의 그물안에서 보호되고 또는
얽어매여진다.

이러한 법들은 분과위원회에서 철저하게 검토되고 걸러져야 한다.

오늘의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청으로 성립했다.

권력의 구성을 선거로 하고도 민주주의의 현실화는 여러 기구와 실행의
통로에서 민주적 시행규칙과 관행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하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진짜 선진국이란 도덕과 생활의 면에서 정상적인 사회이다.

뇌물을 주지 않고서 떳떳함만으로 뜻하는 바를 할수 있는 사회가 민주사회
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요체인 자유의 요체이다.

다른나라 선거에서 흔히 보는것은 국민복지에 관한 논쟁이다.

고용 복지 연금 의료 교육 주택 조세 도시 농촌 환경- 이러한 것들이
정당 정책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이것이 선거의 쟁점이 된다.

우리의 정당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고 일관성 있는 정책들을
제시하고 그 정책을 현실이 되게할 도덕적 정열을 가지고 있는가.

정치가 구체적인 국민의 복지에서 떠나있는 데에는 대중매체의 책임이
크다.

대중매체들의 관심은 권력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또는 출세하는 사람들과 일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장관, 국회의원, 공직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자리
자체로서 중요해진다.

누가 거물정치가인가는 국민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권력에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 있을수 있는가에 의하여 정해진다.

매체가 만들어내는 영웅들과 스타들을 보면 그렇다.

정치인은 국민을 위한 무슨 구체적인 일에서 무엇을 했는가에 의하여
평가되고 그것에 기초하여 선출되어야 한다.

국회의원 또는 정치인에 대한 항목별 고가표가 필요하다.

이것을 작성하고 공개하고 이를 선거나 공직취임의 가늠자가 되게 하는
일은 대중매체와 사회단체들이 할수 있는 일이다.

물론 국민들도 흥분을 먹고 사는 일을 삼가고, 자기의 일을 공부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