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 "학이시습지면 부역설호요, 유붕이 자원방래면 부역악호며
인불지이불 이면 부적군자"라 하였는데 남아로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세가지
선현의 말씀을 지키고 얻는데는 남다른 노력과 기회가 주어져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긴 군생활을 끝내고 고려해학에 복학하여 보니 59학년
입학동기생들은 이미 다 떠났고 6년 후배인 동생들과 동급생이 되어 뒤늦게
공부를 하게되었다.

새롭게 만난 동급생 중에는 나이는 비슷하난 분명 복학생 아닌 노입학생이
있었으니 내심 반갑기도 하고 또한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그들의 용기와
패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뒤늦게 안일이지만 의사의 길인 의대를 다니다가 법대로 대방향을 전환
하였거나 사범대학졸업후 교사로 봉직하다가 새로운 각오로 진로를 바꾼
친구들이였으니 남다른 각오와 포부가 있었으리라!

이렇게 동병상련의 정으로 일곱 벗들은 새로운 인연으로 맺게 되었으니
군자지도중 두가지를 얻은 그때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60년대 대학생활이 다 그러했듯이 경제적으로는 항상 쪼들렸을지 몰라도
학업에 대한 열정과 젊음의 패기가 남못지 않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없는
주머니 사정에도 십시일반, 서로의 하숙방으로 자취방으로 돌아가며
두레술상을 놓고 역사를 논하고 반론하며 학문을 설하면 역설로 공박하기도
하며 밤새는 줄 모르고 즐거운 대학생활을 보냈다.

어느 때부턴가 친구들은 모임을 기다리고 사랑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모임의 명침을 "칠우회"라 부르게 되었고 졸업후에도 모임의 전통은 이어져
무대가 회원들 집에서 집으로 연계되어 대학시절의 논과 설은 이제 자녀들의
학업과 장래걱정, 대소사의 집안 일로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가장들로
변모하였으나 그때의 우의와 정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동안 칠우회원들은 고향가꾸는 나무심기나 폐허가 되어가는 유적지키기에
나름대로 정성를 들여왔다.

금년 여름에는 자녀들 입학전쟁에 함께 고생한 마님들을 단체로 미국여행
을 시켜주기도 했다.

항상 명문가의 후손답게 선비의 풍모를 지켜가며 군자지도를 걷는
이장춘군(서울은행 회현동지점장), 항상 매사에 급할게 없고 만서꾼의
위객을 간직하는 임대용군(주 콜롬비아대사관 참사관), 후덕한 마음과
끊임없는 만학으로 명판사를 지낸 손홍익회장(변호사), 심성이 곧고 착하여
모임의 굳은 일을 도맡으며 별난 형들의 고집에도 비위를 잘 맞추는 신근양
(경인운송대표)와 이동곤군(중소기업진흥공단 시카고사무소장)학우들이
평생 동반자들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