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졸지에 어려운 일을 당하면 쉽게 감상적이돼 운명론에
빠져든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자 공동묘지터에 지은 건물이어서 땅이 살기를 품어
사고가 일어 났다느니,언덕위에 지은 백화점은 망하게 되어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항간에 떠도는 것도 그런 예에 속한다.

이런 생각은 서민들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대통령도 뜻하지 않은 큰 사고가 발생하면 그것을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돌린다.

그렇게 말할수 밖에 없었던 참담한 심경을 이해하지 못하는바 아니지만
그 이야기의 바탕에는 "일어날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나 낸들 어쪄랴"라는
운명론적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 떨떠름 하다.

조선왕조의 역대왕들은 가뭄이나 홍수등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하늘의
뜻에따라 왕이 된 자신을 하늘이 견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모든 것이
"부덕의 소치"임을 공표하고 신하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과실을 숨김없이
지적해 줄것을 요청하는 "구언"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이 통치방법은 후대로 내려올 수록제도화돼 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형식적인 것으로 굳어져 버린다.

"구언"요청에 따라 아다투어 올라온 민심수습방안을 논한 상소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한결같이 "대사면과 복권""인사개혁"으로 "대화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어서 오히려 왕의 통치에 혼란을 가져오기 일수였다.

그 한예로 당파싸움이 심했던 영조때는 장관급인 대사헌을 10일만에
대사간을 3일만에,도승지를 5일만에,홍문관부제학을 3일만에,성균관대사성을
3,4일 간격으로 1개월동안에 3번씩이나 바꾸는데 혼란을 일으켰다.

지방선거참패와 삼풍백화점붕괴로 코너에 몰린 집권당이 요즘 민심수습책
으로 대사면과 복권,인사개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해야만 "대화합"을 이룰수 있다는 발상도 어쩌면 그렇게 왕조시대의
정치인과 똑같은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지방선거의 참패나 삼풍백화점붕괴가 "천재지변"은 아니고,
오늘날의 대통령은 하늘이 점지한 왕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인품은 명성을 이루는 요소이기는 해도 별로
역동적인 요소는 못된다는 것이 정치학자들의 견해다.

그런데도 여전히 옛 왕조시대처럼 풍수지리가 어떠니,부덕의 소치니
하며 "낸들어쩌랴"는 식의 사고에 휘말리곤 하는 보면 한국사회의
잘못된 정신풍토의 일면을 무너진 건물잔해처럼 있는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