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섭< 통계청 국제통계과장 >

지난 5월에 1주일간의 한일 통계협력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일본을
다녀온적이 있다.

우리는 양국대표간의 오찬중에 통계분야의 선진화를 입증해 주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5,000명이 넘는 생명을 앗아간 고베시의 지진이후에 있었던 통계조사에
관한 것이었다.

소비자 물가지수를 작성하기 위하여 매월 현청직원이 조사를 수행하는데
지진이후인 지난 2월초에는 현청직원 동원이 어려워 일본의 중앙통계기관인
총무청 통계국직원이 직접 실지조사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조사 결과를 보면 지진후의 물가는 평균적으로 지진전보다 0.3%가 오히려
떨어졌으며, 특히 필수품의 가격이 매우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다소 오른 품목(예:계란 1 에 210~300엔에서 235~333엔으로 소폭 상승)도
있지만 쌀 닭고기 우유 등 대부분의 생필품 가격이 떨어진 것으로 조사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사재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가운데 복구작업이 차분히 진행 되었다는 것이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만약 이런 조사가 없었더라면 국민들은 고베시의
물가가 많이 올랐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때 천재지변중에서도 통계조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해 주고 있는 것이라 볼수 있다.

고베시 지진이후의 통계조사와 관련하여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매일매일
가계부를 작성토록하여 소득및 소비실태의 변동을 파악하는 가계조사에
있었다.

지진으로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입은 가구가 많고 피난생활로 가계부를
작성할 수 없는 가구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상시에도 가계부 작성을 계속해 준 가구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통계국을 매우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가계조사에 협조하여 준 사람들에 따르면 "이런 때야 말로 객관적으로
가구의 상황을 조사해 주지 않으면."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어떤 가구에서는 부인이 부상으로 드러눕자 남편이 가계부를 대신 써
주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가계부에 작성된 내용을 살펴보면 지진의 영향이 가계부에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지진초기에는 지출내용이 빵 컵라면 통조림 물 주스만이 기록되어 있다.

2~3일후 부터는 구호물자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며, 집에 목욕탕을 이용
할 수 없어 전철을 타고 이웃도시의 목욕탕에 간 사실도 기재 되어있다.

우리나라는 과연 어떠한가.

공직자에서 부터 기업인 학생 주부에 이르기까지 통계의 중요성을 부인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막상 자기집에 통계조사가 나오면 문전박대하는 가구가 더러 있다.

또 사생활 보호라는 측면에서 통계조사에 응답을 거부하거나 허위로 대답
하는 경우도 있다.

작년에는 모 은행이사 부인이 가계조사에 불응하고 그 지역주민들에게
가계조사에 협조해 주지 말자고 선동까지 한 사례가 있었다.

일본 고베시 지진이후에 비상 상황에서도 통계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는 것을 볼때 우리와는 너무나 차이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나라도 96년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할 예정이고,
이에 발맞춰 각종 제도나 법령을 선진국 수준에 맞게 고치는 작업을 진행중
에 있다.

선진국에서는 다른 어느 분야 못지 않게 통계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OECD가입에 앞서 OECD사무국에서는 주불대사관과 외무부를
통해 여러가지 통계를 요청하는 공한을 수시로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어느나라나 선진국이 되려면 통계부문의 선진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진통계 개발및 개선을 위한 투자확대가 중요하겠지만
통계조사의 응답자인 국민들이 통계에 대한 인식 개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

통계조사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와 정확한 응답이 바로 통계선진화의
지름길인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