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달리 눈치가 비상한 가와지가 직접 상전인 오쿠보의 말뜻을 못 알아
차릴 턱이 만무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 머리까지 굽실거렸다.

오쿠보가 그처럼 구로다를 싸고 도는 것은 같은 가고시마 출신이기도
했지만, 자기의 뜻을 순순히 좇아 일을 마음에 들게 잘 해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조선국에 전권대사로 가서 전쟁을 벌이는 일 없이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그 나라의 굳게 닫혔던 문을 연 공로가 컸다.

그리고 지난해의 서남전쟁 때도 그가 이끈 부대가 구마모토성을 포위하고
있는 사이고의 반군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남달리 구로다를 오쿠보가 신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시청장인 가와지가
모를 턱이 없었다.

그리고 가와지 역시 가고시마 출신이어서 구로다에 대하여 동향인으로서의
정의를 느끼고 있었다.

오쿠보의 속셈을 눈치챈 그는 사이고의 암살단 파견 때와 마찬가지로
알아서 기기 시작했다.

먼저 마루마루진문에 대하여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경시청의 자기 부하 가운데서 심복이라고 할수 있는 사람 셋과
관의 한 사람을 데리고 구로다의 처 세이코의 시체를 검사하기 위해
묘지를 찾아갔다.

매장한지 한달이 넘은 그녀의 묘지를 파헤쳐 관의 뚜껑을 열도록 한
가와지는 잠시 말없이 관속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함께 둘러서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세이코의 시신에 집중되어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어서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후 가와지는 서 있는 여러 사람을 한번 천천히 휘둘러 보았다.

위압적인 그런 눈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시체가 아무렇지도 않군. 여러분 어떻소? 내 말이 맞지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수의가 입혀져 있기는 했으나,얼른 보아도 칼에 베어서 죽은 시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수의의 가슴께에 피가 배어나와 있었고,한쪽 귀밑으로부터 목줄기에
칼자국이 나있었다.

목의 동맥이 잘려 직사한 것이었다.

얼굴과 목에 분을 온통 하얗게 칠갑하듯 발라놓았으나, 그 자국이 드러나
보이며 시체는 부패해가고 있었다.

"왜들 아무 대답이 없소? 노무라상, 내 말이 안 맞나요?" 관의인 노무라를
노려보듯 바라보며 물었다.

"예, 맞습니다" 들릴듯 말듯 대답하고, 노무라는 고개를 떨구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