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라는 말의 인기가 마치 기차를 타고 달리듯 요란한 것이
요즘이다.

그것은 마치 21세기를 준비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시대정신인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학자는 "세계화"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돈조차 조국을 모르는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글로벌문화"라는 말도 등장하지 오래다.

그것은 "무국적문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각국의 문화가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또 문화의 세계화란 문화의 동질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각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은 그대로 인정된다.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것 이라는 명제도 가능해진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효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였다.

인간이 자기생명의 근원을 자각,감사하고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생명에
대한 긍정에서 실천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효이다.

효는 생명이 자손을 통해 계승 발전해 가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인 효의 싹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뻗어 가고
이 사랑이 자연에까지 나아가 일체감을 이룬다.

"아비는 하늘이요,어미는 땅이요,백성은 모두 내동포"(부건모곤
민오동포)라는 식으로 확대되는 효의 의미는 이처럼 심오하다.

효의 예절이 형식화 관습화 되어 개인의 진취적 기상을 억압하고
사회의 합리적 개혁을 둔화시킨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한때 우리는
효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따지나 잘못 인식된 효의 역기능이었을 뿐이다.

지난해에는 유난하게 끔찍한 패륜행위가 많았다.

그런탓인지 연초부터 서구윤리체계에 흠뻑젖은 우리사회에서 참된
효의 가치를 다시 강조하는 분위기를 읽을수 있다.

요즘 각부처의 새해 업무보고내용을 보면 세계화의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는 화려한 정책일색이다.

그중 부모생일때 공무원에게 "효친휴가"를 주겠다는 총무처의 보고는
작은 일이기는 해도 관심을 끌만한 사안이다.

그러나 효의 성격으로 미루어 하루나 이틀의 휴가가 효의 확산에
어느정도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시간이 없어 효도를 못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고 타율적인 효의
강요는 의미없는 일이 되고만다.

효에 대한 문제가 왜 총무처만의 소관이 되어야 하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럴듯한 명분만 내세워 실효성없는 계획을 세울것이 아니라 효가
진정 이 시대에도 가치있는 것이라면 "효친휴가"보다는 다른 차원의
방도가 모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