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앞에서 이끌어 가야할 우리나라금융산업이 실물경제에 비해서도
뒤처져있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말이다.

20년전 현대건설은 은행지점장에게 수시로 문안을 드려야 할 중소기업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그룹의 총자산규모(34조원)가 시중은행의 규모(30조원)를
능가하고 있다.

20년전이나 지금이나 은행은 제자리걸음을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외국의 은행들과 비교해 보면 그 위상은 더욱 참담하다.

1인당 자산규모는 약11분의1, 당기순이익은 일본,싱가포르은행의 6분의1에
불과하다.

금융기법의 한 척도로서 우리나라 은행의 작년말 총 선물환계약잔액이
35억달러인데 비하여 미국계 시티은행 하나의 계약잔액만도 우리전체의
3백배가 넘고 있다.

그래서 지난주 스위스의 IMD보고서에서는 우리나라의 금융부문이 41개
평가국중에서 39위라고 발표한바 있다.

어째 이럴수가 있는가.

그 일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건국이래 우리나라 은행은 경영이라는 개념도 공정한
경쟁이라는 룰도 모르고 지내왔다.

금리도 정부가 정해주는대로, 대출도 해주라는 곳에 했고 증자도 점포수도
정부의 몫이었다.

그러자니 도무지 차별이라는 것이 없다.

은행감독원의 통일규정대로 절차도 관행도 금융기법도 모두 똑같다.

이른바 호송선단이다.

위험을 피해 같이 움직이되 가장 늦은 배의 항속을 맞추어 가는 전근대적
항해 방법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선단은 실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파고(시장개방)는 거세지고 유속(시장변화)도 빨라지고 시계는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선단을 해체하는 것이다.

한두척 침몰을 각오라더라도 각기 살길을 찾아 나서게 해야 한다.

금융자율화가 한시각도 늦출수 없는 국가적과제가 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