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1918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1918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우아하고 기품 있게 느껴집니다. 갸름한 얼굴, 가는 목, 얼굴을 받치고 있는 긴 손가락, 이를 부드럽고 둥글게 표현해낸 곡선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이상합니다. 눈에 눈동자가 없습니다.

눈은 초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물의 기분과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니까요. 이 그림은 대체 왜 눈에서 눈동자를 빼서, 이를 알 수 없게 한 걸까요.

이 작품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가 그린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입니다.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가 뜨겁게 사랑한 연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화폭에 담으면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니 더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당사자인 에뷔테른도 궁금해서 모딜리아니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리는 제 얼굴엔 왜 눈동자가 없나요?"

그러자 그가 답했습니다. "당신의 영혼을 다 알고 난 후에 눈동자를 그리겠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초상화에 연인의 영혼을 온전히 담아내고 싶었던 모딜리아니. 그래서 그 영혼에 깊숙이 도달하기 전까지 눈동자를 비워둔 것이죠.

그는 26점에 달하는 에뷔테른의 초상화를 그리며, 연인을 점점 알아가고 사랑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말대로 에뷔테른의 초상화엔 눈동자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눈동자에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과 이를 바라보는 자신의 영혼을 함께 불어넣은 것이죠.
에뷔테른의 초상, 1919
에뷔테른의 초상, 1919
에뷔테른의 초상, 1918
에뷔테른의 초상, 1918
불멸의 사랑과 이를 담은 작품들로 오늘날까지 자주 회자되고 있는 모딜리아니. 그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벨 에포크 시대, '몽마르트의 보헤미안'으로 불릴 만큼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즐겼던 화가. 그러나 끝내 비극으로 끝나버린 애달픈 모딜리아니의 삶과 사랑 이야기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리보르노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안타깝게도 어릴 때부터 몸이 매우 약했습니다. 늑막염, 폐렴, 결핵, 장티푸스 등 온갖 병에 시달렸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가정 형편도 좋지 않았는데요. 그의 아버지는 목재와 석탄을 파는 사업가였지만, 그가 어렸을 때 파산에 이르렀습니다.

아버지는 그 충격 탓인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가족들은 생계를 이어가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모딜리아니는 예술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엔 문화적 소양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머니는 평소 예술과 문학 등을 즐겼습니다. 생계를 위해 시를 번역하고 서평을 써서 돈을 조금씩 벌기도 했죠.

모딜리아니도 어머니를 따라 단테, 니체, 보들레르 등의 글을 즐겨 읽었습니다. 그림 작업을 하면서 시를 종종 읊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가난에도 아들의 건강과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아픈 모딜리아니를 위해 기후가 따뜻한 곳으로 요양도 함께 떠났습니다.

모딜리아니가 어머니와 함께 로마에서 함께 본 미술 작품들은 그에게 큰 영감을 줬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고전 미술에 빠졌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17살 때 미술학교를 다니던 모딜리아니는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내 인생이 즐겁게 흘러가는 풍요로운 강물이 되기를 원해. 지금 나 자신으로부터 끝없는 창조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어.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마구 솟아올라.”

그리고 22살이 되던 해, 그는 더 큰 무대에서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향했습니다.
파리 사교계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던 모딜리아니
파리 사교계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던 모딜리아니
당시 파리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대)’라 불릴 만큼 문화·예술이 찬란하게 꽃 피고 있었습니다.

벨 에포크는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14년까지의 기간을 이릅니다. 이 시기 파리엔 인상파, 입체파 등 다양한 사조의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고, 그만큼 개성 강한 작품들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모딜리아니는 세잔의 작품들에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세잔처럼 초상화도 즐겨 그리기 시작했죠.

피카소뿐 아니라 세잔도 아프리카 원시 가면 등 아프리카 미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요. 이 또한 모딜리아니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 다수에서 아프리카 가면과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길고 평면적인 얼굴과 아몬드 형태의 눈, 긴 목 등이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리에선 젊은 외국 화가들을 중심으로 예술인 공동체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은 인상파, 입체파 등 특정 사조에 속하지 않고 제각각의 화풍을 만들어냈죠. 그중에서도 모딜리아니, 마르크 샤갈 등 유대인 화가들은 아름답고 감각적인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이방인이었지만, 파리 사교계를 주름 잡았습니다. 잘생긴 얼굴, 세련되고 멋진 옷차림의 그는 사교계에서 인기 만점이었죠. 몸이 좋지 않았지만 술을 즐겨 마셨고, 여자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작업을 게을리하진 않았습니다. 모딜리아니는 회화보다 조각에 좀 더 빠져 있었는데요.

1909년부터 '현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콘스탄틴 브랑쿠시로부터 조각을 배우며 석조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조각에도 아프리카 미술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독특한 인상을 주는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만든 조각상
모딜리아니가 만든 조각상
그는 조각 작업에 열심히 매달렸지만, 아쉽게도 건강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커다란 돌을 깎는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체력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폐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작업 도중 휘날리는 돌가루도 건강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조각을 중단하고 회화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워낙 뛰어난 화가들이 많이 활동하던 시기인 만큼, 회화로 인정받기 쉽지 않았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에 대해선 혹평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1917년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개최했지만, 여기에 전시된 누드화들 때문에 전시회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누드화가 퇴폐적이란 이유로 경찰서에 소환되기까지 했죠.

그렇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너져 내리고 있던 모딜리아니에게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1917년 에뷔테른을 만나게 된 것이죠. 모딜리아니는 당시 33살이었고, 에뷔테른은 19살의 미술학도였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연인이었던 잔 에뷔테른.
모딜리아니의 연인이었던 잔 에뷔테른.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했지만, 에뷔테른의 부모님은 두 사람 사이를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에뷔테른의 집안은 부르주아 가문으로 부유했는데요. 가난하고 몸도 아프고 나이 차도 많이 나는 모딜리아니를 탐탁지 않아 하셨죠.

하지만 에뷔테른은 이미 모딜리아니에게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상대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서로를 다독여줬죠.

그러나 가난과 병은 이들의 오랜 행복을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에뷔테른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그리고 화가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계속되는 병도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죠.
모딜리아니의 자화상, 1919
모딜리아니의 자화상, 1919
당시 모딜리아니의 무기력함은 그가 유일하게 그린 자화상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두꺼운 코트와 목도리로 몸을 꽁꽁 싸맸죠. 그럼에도 자신이 화가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팔레트를 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모딜리아니는 결국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살 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에뷔테른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신 중이었지만 사랑하는 모딜리아니를 따라 투신자살했죠.
'누워있는 나부', 1917
'누워있는 나부', 1917
뛰어난 재능에도 생전엔 인정받지 못했던 모딜리아니. 그는 사후에야 재평가 받았습니다.

2018년 모딜리아니가 그린 누드화 '누워있는 나부'는 1억5720만 달러(약 1840억원)에 낙찰됐습니다.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네번째로 높은 가격이었죠.

그가 죽자 묘비에도 이런 문구가 적혔습니다.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그리고 모딜리아니를 따라간 에뷔테른의 묘비엔 이런 글이 새겨졌습니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동반자."

즐겁게 흘러가는 풍요로운 강물이 되길 원했던 모딜리아니. 그리고 그를 열렬히 사랑하고 지지했던 에뷔테른. 이들의 애잔한 마음이 그림에 영원토록 남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