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믿을 수 없고 놀라운 일이 벌어질 때 흔히 ‘영화 같다’고 한다. 작년말 중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일명 ‘우한 폐렴’ 사태의 전개과정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급성 전염병을 소재로 한 ‘아웃브레이크’ ‘컨테이전’ ‘감기’ 같은 영화를 떠올린다.

이 중에서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2011년 영화 ‘컨테이전’은 우한 폐렴과 거의 싱크로율 100%에 가까워 새삼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홍콩 호텔의 요리사가 원인 모를 질병으로 사망한다. 홍콩 출장을 다녀온 베스(기네스 팰트로)가 고열 기침이 심해지더니 갑작스런 발작과 함께 사망하고 남편(맷 데이먼)이 원인을 알기도 전에 아들까지 죽음을 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증상으로 사망한다. 베스는 홍콩에서 호텔 요리사와 악수하고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다. 그 요리사가 조리한 돼지가 야생 박쥐가 먹다가 우리에 떨어뜨린 바나나를 먹었던 것이다. 베스의 몸속 바이러스는 그가 만난 사람, 만진 물건을 통해 삽시간에 세계로 퍼져나간다.

전염병 영화는 대개 공식이 있다. 정체 모를 질병의 출현, 미지의 감염체, 혼란과 공포, 갈팡질팡 하는 정부, 강제 격리와 대치,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한 것인가 고민, 천신만고 끝에 백신 개발, 백신을 둘러싼 아귀다툼, 큰 희생을 남기고 대단원. 한국영화 ‘감기’에서는 탄천 인근에 격리된 발병지 주민들이 탈출을 시도할 때 발포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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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전(contagion)은 접촉, 감염, 전염병을 뜻한다. 이 영화의 홍보 문구가 ‘아무 것도 만지지 마라, 누구도 만나지 마라!’다. 전염병의 매개체는 야생동물 중에도 위험 바이러스가 가장 많다는 박쥐와 흔히 식용으로 이용되는 돼지였고, 발병지가 중국(홍콩)이란 점에서 우한 폐렴을 연상시킨다. 영화와 현실에서의 증상도 발열, 기침, 호흡곤란 등으로 유사하다. 영화 속에서 소요사태를 우려한 정부 고위관리들이 사실을 축소·은폐하듯이, 중국 당국은 우한에서 이상 질환이 발생한 뒤 약 3주 동안 쉬쉬해 전염병을 키웠다. 영화 속에서 진실이 은폐됐다는 음모론이 퍼져 전염병보다 더한 공포를 낳았다면, 현실의 중국에서는 인터넷과 SNS에서의 괴담이나 정부 비판글에 대한 차단 조치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그러나 인류가 전염병을 정복한 줄 알았는데 21세기 들어 사스(중중 급성호흡기증후군), 메르스, 우한 폐렴 등이 연이어 창궐하는 것을 보면 인간과 바이러스 간에 ‘붉은 여왕 효과’가 벌어지는 듯하다. 인간이 백신을 개발하지만 바이러스는 변종을 거듭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과 바이러스가 서로 살기 위해 무한 경주를 벌이는 것 같다.

하지만 인류 문명사는 전염병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상 세계적으로 2000만명 이상 사망자를 낸 전염병 대유행은 네 차례였다. 14세기 페스트, 16세기 컬럼버스 교환에 의한 중남미 천연두,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 20세기 말 에이즈다. 현대의 페스트로 불렸던 에이즈도 이제는 감염경로가 확실히 밝혀져 예방할 수 있고, 약으로 관리가능한 만성질환이 돼가고 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이질 천연두 홍역 성홍열 티푸스 콜레라 등은 한번 퍼지면 큰 피해를 입혔지만 지금은 예방접종으로 대처 가능하다. 현대 의학은 우한 폐렴도 반드시 극복해낼 것이다. 다만 신종 전염병의 출몰과 백신 개발 사이의 그 시간 동안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이다.

늘 상상 이상을 보여주는 중국의 보건위생 환경과 정보를 제한하는 통제사회가 초동 대처할 수 있었던 전염병을 팬데믹(대유행)으로 키웠다. ‘도시 봉쇄’가 현실에서 목격되고, 인근 지역에서 우한 시민들의 이주를 막는 장면을 보면 오히려 총칼보다 더 무서운 게 불신과 공포다. 국민의 우려, 시장의 불안은 사태가 어떻게 번질지, 언제나 잡힐지, 파장이 얼마나 클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 있다.

그런 점에서 우한 폐렴 같은 급성 전염병을 다스릴 최선의 백신은 ‘정직한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정부당국이 정확한 정보를 알리고, 신속하게 대처해야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가 뒤따를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우한 폐렴을 ‘마귀’라고 지칭하며 자신이 지휘하고 있다고 했지만 싸워야 할 대상은 바이러스뿐 아니라 14억 중국인들의 불신과 불안일 지도 모른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었어도 보건위생 의식은 아직 상당한 괴리가 있다. 과거 숱한 전염병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한 셈이다. 오죽하면 돼지로 인한 인플루엔자가 많아 성서의 종말론(Apocalypse)과 돼지(pork)를 결합한 ‘아포칼립스(aporkalypse)’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이번 사태를 겪고 나면 중국인들도 좀 더 정직한 정부를 갖게 되지 않을까.
중국과 숙명적으로 이웃해 살아야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지난 정권의 메르스 사태 당시 정부의 무능을 질타했던 야당 대표가 대통령이 돼 있다. 좌파 정치는 대체로 비판에는 능하지만 문제 해결 능력에는 의문부호가 달린다. 우한 폐렴 대처는 스스로를 입증할 기회이자 위기가 될 것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