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반미주의자·좌파 아이콘·공산혁명 연설때 비둘기가 어깨에

쿠바 공산 혁명의 아버지 고(故) 피델 카스트로는 냉전 시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만큼 숨겨진 뒷얘기들도 많다.

AFP통신은 26일(현지시간) '피델 카스트로 : 인생의 여섯 가지 스냅샷'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불꽃 인생을 살다간 카스트로의 비화들을 소개했다.

▲ 끈질긴 생명력의 생존자
카스트로는 변호사로 활동하던 1953년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타도하려고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실패했다.

당시 바티스타는 수많은 반군을 처형했지만 카스트로는 목숨을 부지하고 2년 뒤인 1955년 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멕시코로 건너간 뒤 쿠바 정권을 공격할 조직을 건설하고 19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을 결국 무너뜨렸다.

한때 12명에 불과했던 조직을 이끌고 8만 명의 바티스타 군대를 쓰러트린 성과였다.

쿠바의 공산 혁명은 냉전 시대 미국으로선 코앞에서 '붉은 위협'을 마주한 모양새였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중심으로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모두 634회 있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카스트로는 만약을 대비해 브라우닝 권총을 거의 항상 차고 다닌다고 한때 고백하기도 했다.

방탄조끼를 입는다는 설은 부인했다.

카스트로는 1979년 기자들에게 가슴을 까보이면서 "나는 힘이 센 '도덕의 방탄조끼'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항상 나를 보호해준다"고 말했다.

▲ 매력남
강인한 인상의 카스트로는 쿠바인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았다.

그는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카스트로의 실물을 두 번 본 한 여성팬은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그의 얼굴을 보고 '그를 사랑한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카스트로는 공식적으로 두 번 결혼을 했고 3명의 여성과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뒀다.

카스트로가 비밀스러운 불륜을 했고 더 많은 자식이 있다는 소문도 있다.

카스트로는 1992년 "사생활은 홍보나 정치를 위한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며 사생활 보호를 강조했다.

▲ 철저한 반미주의자
카스트로는 본인 스스로 "미 제국주의"의 반대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반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면서 미국과 날 선 대립을 반복했다.

가장 극한 대립은 핵전쟁 위기까지 갔던 1962년에 있었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은 정찰기를 통해 구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했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 22일 미 해군에 쿠바를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14만 명의 병력을 준비했다.

그해 10월 26일 러시아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고 터키에서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하는 조건을 내걸면서 협상을 했다.

극한의 대치까지 갔던 사태는 결국 구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고 미국이 쿠바 해상의 봉쇄를 해제하면서 극적으로 타협을 이뤘다.

카스트로는 이후에도 미국을 향한 분노를 내내 거두지 않으면서 살았다.

그는 일생을 미국에 맞서 살면서 쿠바 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일각에선 시민권을 압박하고 정적을 가두고 처형한 독재자라는 평가도 나온다.

반체제 인사인 마르타 베아트리츠 로케는 "그(카스트로)를 3개의 E로 표현할 수 있는데 병적 자기중심적(Egomaniacal)·독선적(egotistical)·이기적(egocentric)인 인물"이라며 "나는 독재자로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블가능에의 도전
카스트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해내려고 노력했다.

그는 1961년 야심에 찬 교육운동을 통해 지방 사람들의 문맹을 거의 없앴다.

망명으로 쿠바를 떠나는 행렬이 이어져 의사가 3천 명만 남았을 때 카스트로는 "의료 강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쿠바엔 8만8천 명의 의사가 있으며 의료 체계가 잘 갖춰진 나라로 손꼽힌다.

물론 획기적인 사탕수수 재배, 버펄로 증산, 치즈 가공 등에서 성공하지 못한 일들도 있었다.

쿠바인들은 결코 기대했던 성과가 나오지 않는 '피델식 계획'에 익숙해져 있다.

▲ 좌파 아이콘
쿠바의 공산 혁명이 성공한 뒤 카스트로는 남미의 좌파 세력을 지원했다.

냉전 시대에 앙골라, 에티오피아, 콩고 등 아프리카와 시리아에 38만6천 명의 병력을 보내기도 했다.

카스트로의 군사 지원 성과를 놓고 엇갈린 평가가 나오지만 좌파 아이콘으로서의 상징성은 강력하다.

▲ 공산 혁명 연설 때 내려앉은 비둘기
카스트로가 1959년 공산혁명을 선언하는 연설을 할 때 그의 어깨에는 하얀색 비둘기가 내려앉았다.

그 이후 카스트로는 쿠바인들에게 신화적 인물이 됐다.

쿠바인들은 카스트로가 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여겼다.

몇몇 사람은 카스트로가 불멸의 존재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인간이었고 지난 25일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서울연합뉴스) 김남권 기자 kong7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