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몇개의 숫자들이 있다. 1백억달러(1973년),6백억달러(1983년),9천2백억달러(1993년),1조2천억달러(2002년). 딱딱한 수치들이지만 국제외환시장의 옷깃이라도 스쳐보고 싶다면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무엇일까. 일단 힌트 하나는 나왔다. 국제외환시장이라는 단어다. 그러나 이것으론 부족하다. "고정환율제에서는 금액이 작고,변동환율제에서는 크다." 두번째 힌트다. 1973년에는 국제환율이 고정돼 있었기에 1백억달러밖에 안됐다. 서론이 길었다. 빨리 정체를 밝히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국제외환시장의 하루평균 외환거래액이 이 숫자들의 정체다. 지난 22,23일 연이틀 일본정부가 국제 외환시장과 싸움을 벌였다. 그 싸움은 엔고를 막기 위한 시장개입이었고,전비로 50억달러가 투입됐다. 50억달러는 금액자체로 보면 대단한 금액이다. 그렇지만 하루 외환거래액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엔화가치는 개입전 달러당 1백23엔선에서 개입후 1백25엔대로 떨어졌다가 다시 1백24엔선으로 올라갔다. 시장개입은 승산없는 싸움이다. '1조2천억달러 대(對) 50억달러'의 경기결과는 보나 마나다. 역사가 증명한다. 달러당 80엔이란 '슈퍼엔고'의 기세가 등등했던 1995년,엔고격퇴에 세계가 나섰다. 일본과 미국은 수시로 시장에 개입하고,G7과 스위스 벨기에 등 18개국의 동시개입도 이뤄졌다. 그해 개입 횟수는 모두 10여차례,총개입액은 5백억달러를 넘었다. 그러나 효과는 거의 없었다. 개입직후 엔화가치가 1~3엔씩 떨어졌지만 하루 이틀뒤에는 원상복구되곤 했다. 수십·수백억달러의 시장개입으로 환율 흐름을 바꿀수 있었다면 세계경제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1997년 아시아는 외환위기를 겪지도 않았고,이듬해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채무상환유예)을 선언하지도 않았을 게다. 아르헨티나의 국가부도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시장과 싸워 환율안정을 꾀할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기엔 세계외환시장 규모가 너무 크다. lee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