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은행 강도
‘내일을 향해 쏴라’는 할리우드의 고전 중 고전이다. 대부처럼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다. 흔한 권선징악적 해피엔딩도 아니다. 궁지를 전전하는 삶이지만 여유와 유머, 잘 짜여진 낭만이 있다. 무엇보다 부초 같은 은행 강도의 도주에는 페이소스가 있다. ‘머리 위로 빗방울은 하염없이 떨어지고…’라는 기타 반주의 주제곡도 팝의 클래식이다. 황금콤비 중 구변 좋은 늙은 은행털이 폴 뉴먼은 떠났고, 로버트 레드포드도 이젠 팔순이다.

금고 강도 정도는 한국 영화에서도 흔하다. 현금수송차량 습격은 현실에서도 상습적이다. 도둑 세계의 수익만으로 보면 은행 강도가 상도둑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잡히지만 않는다면’ 그렇다. 실은 떼이지만 않는다면 ‘돈장사’가 제일 남는 장사라고도 했다. 금융업에선 문자 써서 ‘리스크 관리’라고 하지만 떼일 위험에 대한 대응기법을 고상하게 일컫는 말이다.

세상이 변하니 은행 강도 역시 진화하고 있다. 선인장 뒤에 숨어 역마차를 기습하던 총잡이들은 정보기술(IT)로 무장한 지능범으로 바뀌었다. 결국 ‘은행 중의 은행’ 중앙은행 전문 털이범까지 나타났다.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이 미국 중앙은행(Fed)에 맡겨둔 자금이 해킹으로 털린 것은 지난 2월이다. 100일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털린 돈 1억100만달러(약 1200억원) 중 스리랑카로 간 2000만달러는 되찾았지만 필리핀으로 이체된 8100만달러는 행방불명이다. 이 돈이 두 개 이상의 카지노에서 베팅칩 구입에 쓰였다는 정도만 파악됐다. 역마차 시절 낭만 강도나 중앙은행을 공격한 초특급 해커나 기껏 도박장부터 찾는 모양이다.

국제 해커들은 9억5100만달러를 노렸으나 35건의 이체 중 8100만달러 1건만 성공했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방식으로 네덜란드 파나마 케냐 멕시코 보스니아 몰디브 도미니크공화국의 중앙은행을 노린 사실도 드러났다. 지난 12일 밤부터 13일까지 한국은행 영문 홈페이지의 접속 속도가 현저히 느려져 비상이 걸렸다. 사전 예고된 국제 해커그룹 어나니머스의 디도스(분산서비스거부) 공격이었다. 세계 금융회사 200개의 웹사이트 습격 프로그램이었다니, 이 정도는 악동들이 성벽 아래로 몰려가 욕지거리나 퍼붓고 달아난 상황이랄까.

한은이 내년 6월부터 3년간 청사를 리모델링할 예정이어서 지하 금고의 현금 처리가 새삼 화제다. 10조원을 이송하자면 전액 5만원권이라도 수송차 500대가 필요하다. 국제 프로해커 대비하랴, 현금박스 노리는 잡범이라도 예방하랴, 국책은행 자본확충만 한은의 고민은 아닌 것 같다.

허원순 논설의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