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아파트를 가릴 정도로 키 큰 메타세쿼이아가 저수지를 감싼 채 깊은 숲길을 이루고 있다. 나무 사이로 반바지 차림의 외국인이 추위는 아랑곳없이 조깅을 하고, 호숫가의 떨어진 나뭇가지 위에는 잠시 쉬어가는 것인지, 먹이를 찾는 것인지 청둥오리와 가마우지가 사뿐히 서 있다. 치열했으니, 화려했으니, 이쯤에서 쉬어가라고 말해주는 듯 일월수목원의 첫 겨울은 넉넉하고 고요하다.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우거진 일월공원 옆으로 기다란 덱 길이 놓인 일월수목원의 습지원./사진=이효태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우거진 일월공원 옆으로 기다란 덱 길이 놓인 일월수목원의 습지원./사진=이효태

친숙한 놀라움, 일월수목원

2023년 5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일월저수지 일원에 일월수목원이 문을 열었다. 1년도 되지 않아 그 존재감과 영향력을 막강하게 드러내는 수목원은 마치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주민들의 삶, 생태와 하나 어긋남 없이 조화롭다.
고목과 고사리의 만남으로 생명이 재탄생하는 햇빛정원./사진=이효태
고목과 고사리의 만남으로 생명이 재탄생하는 햇빛정원./사진=이효태

일월수목원은 10만1500㎡ 규모에 2016종 5만2000여 본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규모, 수량보다 인상적인 것은 조경의 미학이다. 사람들이 어떤 콘텐츠에 열광한다면, 그 콘텐츠는 십중팔구 ‘친숙한 놀라움’이라는 힘을 내재하고 있을 것이다. 저수지, 공원, 아파트라는 친숙한 공간에 새롭게 조성된 수목원이라는 콘텐츠는 ‘우리가 살던 곳이 이렇게 멋진 곳이었어?’라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방문자센터의 통창으로 보이는 수목원의 풍경이 갤러리 작품처럼 펼쳐진다./사진=이효태
방문자센터의 통창으로 보이는 수목원의 풍경이 갤러리 작품처럼 펼쳐진다./사진=이효태
일월수목원은 방문자센터를 기준으로 크게 생태정원과 웰컴정원으로 나뉘며 전방에 일월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다. 저수지 맞은편은 물놀이장, 수변덱, 야외무대, 조류관찰대 등을 갖춘 일월공원으로 일대는 장안구의 허파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높다란 유리 통창이 드리워진 방문자센터에서 시민들은 관람객이 된다.
일월수목원의 인기 스폿 중 하나. 전시온실./사진=이효태
일월수목원의 인기 스폿 중 하나. 전시온실./사진=이효태
생태공원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전시온실은 지중해,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 등 세계적으로 강수량이 적은 건조기후대를 주제로 대표적인 식물 300여 종을 관찰할 수 있다. 팥죽색의 꽃이 피는 호주의 방크시아, 코알라가 좋아하는 유칼립투스, 줄기 밑동에 수분을 저장하는 멕시코 원산의 덕구리난 등에 시선을 빼앗긴 채 걷다 보면 유럽의 작은 고성을 연상케 하는 전시홀이 나타난다. 베이지색 난간 너머로 펼쳐지는 초록의 정원은 생생한 입체감으로 탄성을 일으킨다.
오색 단풍낙엽이 양탄자처럼 깔린 일월수목원./사진=이효태
오색 단풍낙엽이 양탄자처럼 깔린 일월수목원./사진=이효태
오색 단풍낙엽이 겹겹이 쌓인 작은 숲속에는 간이 의자가 놓였고, 작은 조명이 별빛처럼 빛나 겨울 낭만을 돋운다. 숲길은 수원화성을 축성하는 데 공헌한 다산 정약용을 기리는 ‘다산정원’에 이어 습지원, 빗물정원으로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색다른 길로 객을 안내한다.

수원특례시는 같은 시기 장안구에 일월수목원을, 영통구에 영흥수목원을 조성해 두 곳을 수원수목원이라 통칭해 부르기도 한다. 영흥수목원은 논과 밭, 둠벙, 산림이라는 기존 공간을 보존하고 그 매력을 더욱 빛나게 하는 곳으로 ‘정원문화 보급형’ 수목원, 일월수목원은 ‘자연주의’ 수목원으로 각각의 가치를 발산한다.

어제를 이어 오늘을 완성하는 수원

‘어제(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미래)은 없다’라는 오랜 경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수원은 결코 어제를 잊을 수 없는 독특한 도시다. 어제의 역사 속에 오늘의 일상이 찬란히 꽃피운 도시가 수원 그 자체이기 때문.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수원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팔달구에는 수원화성이 도심 속 혈맥처럼 살아 움직인다.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의 이상과 철학, 효와 애민정신이 깃든 수원화성은 1794년(정조 18) 공사를 시작해 2년 9개월 만인 1796년 완공했다.
수원이 말했다. 이쯤에서 쉬어가면 어때?
축성의 모든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수원화성의 둘레는 2만7600척, 수로는 12리 남짓. 현 단위 기준으로 환산(문화재청 기준)하면 전체 길이가 5.74㎞에 달한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은 사방으로 팔달문(남), 장안문(북), 창룡문(동), 화서문(서) 4개의 성문과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 포루, 각루, 장대 등을 갖췄다.
수원 화성행궁 봉수당
수원 화성행궁 봉수당
수원화성을 축성하는 데 70여 만 명이 투입되었고, 정조는 성과급제와 공사실명제를 시행해 유무형으로 독보적인 문화유산을 남겼다. 수원 화성행궁의 봉수당에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여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수원 화성행궁에서 열린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수원화성박물관에 봉수당 진찬연의 한 장면이 재현되었다./사진=이효태
수원 화성행궁에서 열린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수원화성박물관에 봉수당 진찬연의 한 장면이 재현되었다./사진=이효태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비극을 목도한 아들이 왕이 되었으니, 당쟁의 험한 파도에서 왕의 하루는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버이와 만백성을 향한 덕은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어 오늘날의 후손과 만나고 있다. 화성행궁 후원 언덕에는 ‘미로한정(未老閒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그림처럼 놓여 있다. 이곳에 서면 화성행궁 너머로 수원의 오늘이 한눈에 펼쳐진다.
화성행궁 후원에 자리한 미로한정에서 바라본 수원 시가지 풍경./사진=이효태
화성행궁 후원에 자리한 미로한정에서 바라본 수원 시가지 풍경./사진=이효태
화성 축성을 시작한 1794년 정월, 정조는 미로한정에 올라 허허벌판이던 수원부에 1000여 집이 들어선 모습을 보며 관리들을 칭찬했다고 전한다. 상공업이 발달한 계획도시로서 수원을 만든 왕의 뜻이 잘 관철된 것이다.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을 담은 미로한정에 한참을 머물렀다. 1800년 49세를 일기로 바삐 생을 마감한 왕에게는 제대로 늙어갈 시간도, 온전히 쉴 시간도 한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수원이 말했다. 이쯤에서 쉬어가면 어때?
일몰 이후 수원화성은 지구 안의 은하수처럼 불을 켠 채 도심을 감싼다. 성문 안의 공방거리, 통닭거리도, 전통시장의 왁자함도 잠이 들면 화홍문 수문으로 쏟아지는 물줄기에 무지개는 뜨고, 방화수류정 용연의 달그림자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여정의 즐거움

수원통닭거리
화성행궁에서 걸어서 8분 거리, 수원의 명물 통닭거리가 자리한다. 기름 부은 가마솥에서 막 튀겨낸 프라이드 치킨과 비법 양념 찹찹 칠한 양념치킨은 생맥주를 부른다. 친절한 사장님과 적당한 가격, 맛까지 삼박자가 딱딱 맞아 기분이 좋아진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1가 46-2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지동시장 순대타운
1박2일로도 부족한 수원 식도락 여정. 이번엔 수원천을 따라 지동교를 건넌다. 이편은 영동시장, 저편은 순대타운이 자리한 지동시장이다. 노포의 향기로 가득한 순대타운에서 입맛에 따라 소곱창볶음, 백순대를 맛본다. 치킨처럼 반반도 된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 창룡문로 3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여정을 돕는 10pick

수원 화성행궁
어질고 효성 지극한 왕으로 잘 알려진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열었다. 사도세자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아들의 지극한 효심,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진찬연의 생생한 장면을 만날 수 있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수원화성박물관
수원이 말했다. 이쯤에서 쉬어가면 어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 수원화성. 당대의 지식인이 대거 투입되어 더욱 빠르고 안전하게 성을 완성했다. 축성에 관한 흥미로운 과정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배울 수 있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1

행궁동 공방거리
수원이 말했다. 이쯤에서 쉬어가면 어때?
예술가들의 삶과 철학이 묻어나는 공방거리. 작업실이자 숍으로 쓰이는 가게 문에는 사장님들의 얼굴이 흑백사진으로 걸려 있고, 자부심 가득한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일원

행리단길
수원이 말했다. 이쯤에서 쉬어가면 어때?
수원이 말했다. 이쯤에서 쉬어가면 어때?
수원 화성행궁 주변에는 다양한 카페가 모여 행리단길(행궁동+경리단길)로 불리는 거리가 자리한다. 최근에는 행리단길을 살짝 벗어난 숨은 공간에서도 감성적인 카페들을 찾아볼 수 있다. 아름다운 수원화성을 바라보며 깊은 맛의 커피와 달달한 디저트를 맛보자.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일원

수원화성
거대한 팔달문과 장안문을 로터리 삼아 버스, 자동차, 트럭 등이 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봄이면 꽃놀이하고, 여름에는 수원천 물줄기를 바라만 봐도 좋고요. 수원화성이 있어 수원은 그 자체로 빛이 난다.
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2

통닭거리
원래는 공방거리를 먼저 들르려고 했는데, 공방거리와 통닭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뭐예요. 배고픈데 마침 잘됐다. 아점(아침+점심)으로 통닭을 먹었어요. 가마솥에서 튀겨낸 프라이드 치킨은 느끼함 없이 담백하고, 양념치킨은 어린이도 좋아할 맛이에요!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1가 46-2

일월수목원
서울에서 가까워 오히려 낯설었던(?) 수원. 과연 수원은 어떤 도시일까? 호기심 반, 걱정 반이었는데 일월수목원과 수원화성을 보고 계획도시의 품격을 느꼈다. 조경의 미학이 담긴 일월수목원은 겨울인데도 참 아름다웠다.
경기 수원시 장안구 일월로 61

방화수류정
수원화성에는 네 개의 각루가 있는데 동북쪽 누정인 동북각루의 이름이 방화수류정이다. 둥그런 연못의 용연과 일곱 개의 수문이 있는 북수문(화홍문)까지 자리해 봄날에는 피크닉 소품을 빌려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도 좋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천로392번길 44-6

수원시립미술관
수원이 말했다. 이쯤에서 쉬어가면 어때?
화성행궁 바로 옆에 수원시립미술관이 자리한다. 매달, 주기별로 수준 높은 기획전시가 열리니 수원 방문했다면 필수 코스 중 하나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33

지동시장 순대타운
지동시장 순대타운에 들어서면 정감 있는 이름의 순대 가게들이 손님을 불러모은다. 엄마네를 갈까, 고향집을 갈까, 은주네를 갈까? 당면, 채소, 곱창, 순대 가득 넣어 전골처럼 즐기는 순대볶음, 최고.
경기 수원시 팔달구 창룡문로 3, 시장 내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