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2년 키이우에서] 일상이 된 공습경보…아이들, 사이렌 들으며 놀이터 뛰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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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상흔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미사일로 창문 흔들려도 밥숟가락 뜨게 되더라"
개전초기 외곽 러 점령지들 찾아…뱅크시 벽화 옆 교전·공습 자국, 자동차 무덤엔 아이들 희생 흔적
"너댓번씩 방공호 가면 일상생활 안 돼…우리 해코지 해놓고 도망 못 갈 것" 19일(현지시간) 낮 12시 6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북서쪽 소도시 보로디안카의 하늘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 뱅크시의 벽화를 촬영하고 있던 기자는 황급히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봤다.
곁에서 그림을 보던 한 여성은 "저기 방공호가 있으니 원하면 가보라"고 일러주고는 지인의 팔짱을 끼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공습경보가 들리지 않는 듯 계속 그네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난 2년간 전쟁의 공포를 일상으로 끌어안고 살아온 마을의 풍경이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을 감행한 직후 이곳을 수주간 점령했다.
수도 키이우 함락을 위한 거점 중 하나였다.
키이우 중심부와 달리 복구의 속도가 느린 외곽 지역들에는 당시의 상흔이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키이우 시내에서 보로디안카까지는 차로 50분 정도 거리였다.
도로 옆 숲에는 곧게 뻗은 줄기를 옆으로 고꾸라트린 자작나무가 종종 눈에 띄었다.
당시 공습의 흔적이다.
잠시 들른 드미트리우카 마을에는 당시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퇴각한 러시아군들이 놓고 간 부서진 탱크와 전투차량들도 시뻘겋게 녹슨 채로 그대로 널려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가로질러 한참을 더 들어가면 보로디안카가 있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이주민들 정착을 위해 조성한 마을이다.
2년 전 키이우를 여러 방면에서 포위하려고 했던 러시아군은 보로디안카 중심가를 통해 고속도로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현지 저항군 때문에 진격이 수주일 지체됐다.
당시 치열했던 교전의 흔적이 거리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담장에는 총탄이 만든 작은 구멍이 즐비했고, 민가들은 지붕이나 벽면이 붕괴한 모습 그대로다.
일부 구역에서 국제사회의 원조로 새로 지어 올린 공공기관 건물의 깨끗한 외관이 오히려 어색해 보일 정도였다.
한 주민이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다"고 한마디 하고 지나갔다.
문화회관 앞 광장에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문학가 타라스 셰우첸코의 흉상이 있는데, 오른쪽 이마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점령 당시 러시아군이 일부러 훼손했다고 한다.
광장 한켠에 뱅크시 작품을 비롯한 여러 벽화가 전시되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이들 그림을 남긴 것이다.
원래는 체조선수 소녀가 두 손으로 잔해를 딛고 물구나무를 서려는 모습이었는데, 그림 아래 돌무더기가 사라진 탓에 체조선수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습경보가 울린 후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니 키이우시 당국의 텔레그램 메시지가 현장 알람보다 3분 빠른 12시 3분에 수신돼 있었다.
좀 더 걸어가니 건물 한쪽 면이 완전히 뜯겨나간 아파트가 서 있었다.
주민 타티아나 루잔스카(64·여) 씨는 "한 번은 공습경보를 들은 사람들이 여기 지하실로 뛰어 들어갔는데, 한 노인만 걸음이 늦어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며 "미사일은 바로 지하실로 내리꽂혔고, 노인만 살았다"고 말했다.
루잔스카 씨는 기자를 즉석에서 인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전기도 물도 통신도 모두 끊긴 상태에서 딸과 손주들을 데리고 버틴 곳이다.
처음엔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당의 지하 창고로 피신했지만, 습기 찬 공기에 아이들이 기침을 심하게 하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그는 "공습에 대비해 재빨리 움직이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하루에 너댓번씩 그렇게 하다 보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며 "얼마 지나니 아이들은 미사일의 충격으로 창문이 흔들리는데도 밥숟갈을 계속 뜨더라"라고 했다.
러시아군 점령 당시 군인과 민간인,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총으로 쐈기 때문에 좀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루잔스카 씨는 한밤중 러시아군의 임시 화장장에서 하늘 높이 불기둥이 치솟는 것도 봤다.
러시아군이 물러간 지금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실종자들이 많다.
루잔스카 씨는 미래 소망에 대한 질문에 '누구라도 우크라이나 사람을 해코지할 수 있지만, 누구나 도망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소개하며 "이미 죽은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지만, 꼭 우리가 승리해서 평화를 되찾았으면 한다"고 답했다.
보로디안카와 키이우 시내 딱 중간쯤에 소도시 이르핀이 있다.
러시아군이 이곳을 지나 키이우 심장부 코앞인 오블론까지 갔었다.
이르핀의 한 신식 아파트 앞에 마련된 '자동차 무덤'을 찾았다.
러시아군의 무차별 사격을 받았던 민간 차량들이 한데 모여 산을 이뤘다.
승용차에 아이가 타고 있었는지, 누군가 가지런히 세워놓은 털인형을 봤을 때는 가슴이 짓눌리는 듯했다.
자동차 무덤을 둘러보던 알렉산드라(36) 씨는 "한 가족과 지인들이 차 두 대에 나눠타고는 몰래 마을을 빠져나가려다가 러시아군의 탱크를 마주쳤는데, 아이들이 탄 앞차에 포탄이 명중했고, 뒤차에 탄 엄마와 친구만 살아남았다고 한다"며 "생존자한테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전했다.
시뻘겋게 녹슨 한 승합차 옆면에는 날개 달린 천사 두 명이 손으로 포탄을 막아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더는 무고한 생명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같았다.
/연합뉴스
개전초기 외곽 러 점령지들 찾아…뱅크시 벽화 옆 교전·공습 자국, 자동차 무덤엔 아이들 희생 흔적
"너댓번씩 방공호 가면 일상생활 안 돼…우리 해코지 해놓고 도망 못 갈 것" 19일(현지시간) 낮 12시 6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북서쪽 소도시 보로디안카의 하늘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 뱅크시의 벽화를 촬영하고 있던 기자는 황급히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봤다.
곁에서 그림을 보던 한 여성은 "저기 방공호가 있으니 원하면 가보라"고 일러주고는 지인의 팔짱을 끼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공습경보가 들리지 않는 듯 계속 그네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난 2년간 전쟁의 공포를 일상으로 끌어안고 살아온 마을의 풍경이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을 감행한 직후 이곳을 수주간 점령했다.
수도 키이우 함락을 위한 거점 중 하나였다.
키이우 중심부와 달리 복구의 속도가 느린 외곽 지역들에는 당시의 상흔이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키이우 시내에서 보로디안카까지는 차로 50분 정도 거리였다.
도로 옆 숲에는 곧게 뻗은 줄기를 옆으로 고꾸라트린 자작나무가 종종 눈에 띄었다.
당시 공습의 흔적이다.
잠시 들른 드미트리우카 마을에는 당시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퇴각한 러시아군들이 놓고 간 부서진 탱크와 전투차량들도 시뻘겋게 녹슨 채로 그대로 널려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가로질러 한참을 더 들어가면 보로디안카가 있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이주민들 정착을 위해 조성한 마을이다.
2년 전 키이우를 여러 방면에서 포위하려고 했던 러시아군은 보로디안카 중심가를 통해 고속도로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현지 저항군 때문에 진격이 수주일 지체됐다.
당시 치열했던 교전의 흔적이 거리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담장에는 총탄이 만든 작은 구멍이 즐비했고, 민가들은 지붕이나 벽면이 붕괴한 모습 그대로다.
일부 구역에서 국제사회의 원조로 새로 지어 올린 공공기관 건물의 깨끗한 외관이 오히려 어색해 보일 정도였다.
한 주민이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다"고 한마디 하고 지나갔다.
문화회관 앞 광장에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문학가 타라스 셰우첸코의 흉상이 있는데, 오른쪽 이마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점령 당시 러시아군이 일부러 훼손했다고 한다.
광장 한켠에 뱅크시 작품을 비롯한 여러 벽화가 전시되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이들 그림을 남긴 것이다.
원래는 체조선수 소녀가 두 손으로 잔해를 딛고 물구나무를 서려는 모습이었는데, 그림 아래 돌무더기가 사라진 탓에 체조선수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습경보가 울린 후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니 키이우시 당국의 텔레그램 메시지가 현장 알람보다 3분 빠른 12시 3분에 수신돼 있었다.
좀 더 걸어가니 건물 한쪽 면이 완전히 뜯겨나간 아파트가 서 있었다.
주민 타티아나 루잔스카(64·여) 씨는 "한 번은 공습경보를 들은 사람들이 여기 지하실로 뛰어 들어갔는데, 한 노인만 걸음이 늦어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며 "미사일은 바로 지하실로 내리꽂혔고, 노인만 살았다"고 말했다.
루잔스카 씨는 기자를 즉석에서 인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전기도 물도 통신도 모두 끊긴 상태에서 딸과 손주들을 데리고 버틴 곳이다.
처음엔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당의 지하 창고로 피신했지만, 습기 찬 공기에 아이들이 기침을 심하게 하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그는 "공습에 대비해 재빨리 움직이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하루에 너댓번씩 그렇게 하다 보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며 "얼마 지나니 아이들은 미사일의 충격으로 창문이 흔들리는데도 밥숟갈을 계속 뜨더라"라고 했다.
러시아군 점령 당시 군인과 민간인,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총으로 쐈기 때문에 좀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루잔스카 씨는 한밤중 러시아군의 임시 화장장에서 하늘 높이 불기둥이 치솟는 것도 봤다.
러시아군이 물러간 지금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실종자들이 많다.
루잔스카 씨는 미래 소망에 대한 질문에 '누구라도 우크라이나 사람을 해코지할 수 있지만, 누구나 도망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소개하며 "이미 죽은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지만, 꼭 우리가 승리해서 평화를 되찾았으면 한다"고 답했다.
보로디안카와 키이우 시내 딱 중간쯤에 소도시 이르핀이 있다.
러시아군이 이곳을 지나 키이우 심장부 코앞인 오블론까지 갔었다.
이르핀의 한 신식 아파트 앞에 마련된 '자동차 무덤'을 찾았다.
러시아군의 무차별 사격을 받았던 민간 차량들이 한데 모여 산을 이뤘다.
승용차에 아이가 타고 있었는지, 누군가 가지런히 세워놓은 털인형을 봤을 때는 가슴이 짓눌리는 듯했다.
자동차 무덤을 둘러보던 알렉산드라(36) 씨는 "한 가족과 지인들이 차 두 대에 나눠타고는 몰래 마을을 빠져나가려다가 러시아군의 탱크를 마주쳤는데, 아이들이 탄 앞차에 포탄이 명중했고, 뒤차에 탄 엄마와 친구만 살아남았다고 한다"며 "생존자한테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전했다.
시뻘겋게 녹슨 한 승합차 옆면에는 날개 달린 천사 두 명이 손으로 포탄을 막아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더는 무고한 생명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같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