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준현 자람테크놀로지 대표가 'XGSPON 스틱'과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 사진=강경주 기자
백준현 자람테크놀로지 대표가 'XGSPON 스틱'과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 사진=강경주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올해 첫 현장 행보로 6G 통신기술 연구개발(R&D) 조직인 삼성리서치를 찾으면서 통신 관련 산업이 대폭 성장할 것이란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자율 주행차·사물인터넷(IoT) 생태계 조성, 증강·가상현실(AR·VR), 클라우드 시스템 구축 등을 위해선 막힘 없는 통신 기술이 뒷받침 돼야한다. 이 같은 분석을 보며 웃음 짓는 코스닥시장 상장사가 있다. 국내 유일의 통신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인 자람테크놀로지의 백준현 대표가 주인공이다. 회사 이름인 '자람'의 뜻을 묻자 "성장의 '자람'과 반도체 설계를 '잘함'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5G 통신용 반도체 'XGSPON'으로 글로벌 시장 공략

25일 경기 성남 본사에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를 가진 백 대표는 "미국 퀄컴·브로드컴, 대만 미디어텍 등 반도체 강국을 대표하는 팹리스는 통신이 주력이라는 공통점을 가졌다"며 "자람테크놀로지도 이들과 같은 길을 갈 것"이라고 입을 열었다.

자람테크놀로지는 LG반도체 설계 엔지니어 출신인 백 대표가 2000년 설립한 회사다. 초창기엔 설계자산(IP) 사업을 했지만 IP를 넘어 칩 설계로 사업 구조를 고도화했다. 팹리스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서 칩 설계 회사를 창업한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백 대표는 "반도체 설계를 할 바엔 차라리 대기업에 취업을 하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며 "LG반도체 시절부터 설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과감히 도전에 나섰다"고 말했다.
차세대 통신용 PON 반도체
차세대 통신용 PON 반도체
자신감을 가지고 팹리스를 차렸지만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기술력은 인정받았지만 대형 고객사가 없다는 이유로 계약이 무산된 적도 부지기수다. 백 대표는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통신 산업이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통신 팹리스'로 특화해 시장을 공략했다. 목표가 뚜렷해진 후부턴 밤낮없이 R&D에 매진했다. 백 대표는 "살이 쭉쭉 빠질 정도로 반도체 설계에 매달렸다"고 회상했다.

그 결과 자람테크놀로지는 별도 광케이블 공사 없이 기가급 인터넷 서비스가 가능한 '기가와이어'와 광신호를 전기신호로 바꿔주는 '광트랜시버'용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이때 무명에 가깝던 자람테크놀로지의 실력을 알아본 회사가 유럽의 대형 통신기업 노키아였다. 노키아와 함께 일본 라쿠텐의 ORAN(개방형 무선네트워크) 기반 5G 기지국에 칩과 광부품을 결합한 '플러거블 ONU'를 판매하면서 업계에 회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백 대표는 자람테크놀로지가 보유한 많은 기술 중에서도 '포인트투멀티포인트(PON)' 솔루션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초고속 통신망의 핵심인 PON은 여러 기지국에서 보내는 광신호를 순차적으로 전달하는 기술이다. 주파수 도달 거리가 짧은 5G망 구축을 위해선 기지국 숫자가 많아야 하고, 신호를 전달하는 장비도 이에 맞춰 설치 대수를 늘려야 하는데 자람테크놀로지의 PON 기술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백 대표는 PON 기술을 바탕으로 2019년 10Gbps 속도의 '5G 통신용반도체(XGSPON) 시스템온칩(SoC)' 개발에 성공했다. 이듬해엔 5G 기지국 연결에 필수 제품인 'XGSPON 스틱'을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전력 소모를 국제표준인 2와트(W) 보다 절반 낮은 0.9W로 구현해 업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자람테크놀로지의 기가와이어
자람테크놀로지의 기가와이어
XGSPON 스틱은 미국 'BEAD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을 것으로도 기대된다. BEAD(Broadband Equity Access and Deployment) 프로그램은 지난해 6월 미국 상무부가 2030년까지 미국 50개주 전역에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겠다고 시작한 사업이다. 약 425억달러(약 56조원)의 투자가 예정됐다. 미국의 대형 통신사들이 사업에 뛰어들어 XGSPON 스틱 판매 증가가 예상된다.

국내엔 SKT, KT, LG유플러스 등 통신사를 비롯해 다산, HFR, 유비쿼스 등 통신장비사들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해외엔 노키아, 칼릭스, AT&T, 버라이즌 등 굵직한 고객사를 보유했다. 지난해 3월 상장 후엔 대형 고객사와의 계약 소식도 내놓고 있다. 백 대표는 "지난 여름 중국 하이센스와 미국향 제품에 XGSPON 칩을 사용하는 200억원 규모의 공급계약을 체결했다"며 "지난해 말엔 글로벌 통신장비 기업과 165억원 규모의 반도체 칩 개발 계약도 체결했다"고 설명했다.

차세대 통신 표준기술 확보 '박차'

자람테크놀로지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우수한 R&D 자원이 꼽힌다. 평균 근속연수 10년 이상의 안정적인 연구 인력을 확보한 데다 전체 직원 63명 중 80%가량인 50명이 R&D 인력이다. 석·박사급 인재는 23%에 달한다. 다수의 특허와 해외 인증도 보유했다. 등록 특허는 73건(국내 69건·해외 4건)이며 해외 인증은 13건이다.
XGSPON 스틱
XGSPON 스틱
회사에 위기가 없었는지 묻자 지난해 불어닥친 반도체 업황 둔화를 꼽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해 TSMC, 마이크론 등 국적과 분야를 불문하고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통신 산업 경기 침체까지 겹쳤다. 국내에서 흑자를 내고 있는 팹리스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도 자람테크놀로지는 계약을 통해 확보한 매출 만으로 올해 흑자전환을 자신하고 있다.

백 대표는 "XGSPON 반도체 칩을 공급할 수 있는 회사가 국내엔 자람테크놀로지 외엔 없고 해외에도 브로드컴, 코티나, 맥스리니어 등 5~6개사에 불과하다"며 "중국 하이센스, 유럽의 최대 통신사와 연이어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올해부터 본격적인 매출 증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람테크놀로지는 XGSPON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25GS-PON'도 개발하며 차세대 통신 표준기술 확보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백 대표는 "25GS-PON은 6G에서 활용할 수 있는 스펙"이라며 "올해 안에 50GS-PON개발 프로젝트까지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미국 톱 통신서비스 사업자들이 25GS-PON 반도체에 관심을 보여 개발자 미팅을 진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백 대표는 디지털전환(DX)과 AI 시대 개화에 맞춰 학습이 가능한 AI칩, 초광대역 통신, 신뢰성 강화 칩도 개발하고 있다. 글로벌 IP 업체인 ARM, 사이파이브(SiFive), 안데스(Andes)같은 개발사와의 협력도 강화해 미래 시스템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지난해 11월 16일 글로벌 반도체 설계자산 기업 Arm이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호텔에서 개최한 'Arm 테크 심포지아(Tech symposia). 백준현 자람테크놀로지 대표는 이 행사에서 키노트 발표를 했다. / 사진=자람테크놀로지
지난해 11월 16일 글로벌 반도체 설계자산 기업 Arm이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호텔에서 개최한 'Arm 테크 심포지아(Tech symposia). 백준현 자람테크놀로지 대표는 이 행사에서 키노트 발표를 했다. / 사진=자람테크놀로지
성남=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