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귀환어부 재심 청구인 불출석에 춘천지법 "나와야 재판 진행"
청구인 측 "출석 의무 없어 문제 안 돼" 재판장 기피신청서 제출
"죽은 아버지의 무죄를 위해 아들이 피고인석에 꼭 서야 하나요"
수십 년 전 간첩으로 몰려 수사기관에 의해 불법으로 구금돼 처벌까지 받았던 납북귀환 어부. 이미 사망한 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을 청구한 아들은 꼭 피고인석에 서야 할까.

사소한듯하지만 청구인으로서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 힘든 선택을 두고 법원과 청구인 측 간 의견이 엇갈리면서 재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서로 '허탕'만 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납북귀환어부 고(故) 이명재씨의 재심 사건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원곡 최정규 변호사는 22일 춘천지법에 형사2부 이영진 부장판사 기피신청서를 냈다.

이씨는 제6해부호 선원으로 조업 중 북한에 납치됐다가 1972년 9월 7일 속초항으로 귀환했다.

이후 반공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수산업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이듬해 12월 춘천지법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간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던 이씨는 2000년 1월 25일 숨졌다.

그로부터 23년이 더 지난 2023년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이씨 사건의 진실규명을 경정하면서, 아들 이씨가 죽어서도 떼지 못한 아버지의 꼬리표를 떼어주기 위해 같은 해 10월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재심개시가 결정되고 첫 공판이 열린 지난 1월 12월 형사2부(이영진 부장판사)는 '청구인이 출석하지 않아 공판을 진행할 수 없다'는 취지로 재판을 연기했다.

최 변호사는 "형사소송법상 재심이 개시된 공판에서 청구인은 사건 당사자가 아니므로 출석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납북귀환어부들의 재심 사건을 도맡아온 최 변호사로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씨 부자 사례처럼 아버지가 숨지고 그 가족들이 재심을 청구한 경우 청구인들의 불출석이 재판에서 문제가 된 사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아버지의 무죄를 위해 아들이 피고인석에 꼭 서야 하나요"
최 변호사에 따르면 재심을 청구하는 납북귀환어부와 그 가족들의 재판을 대하는 태도는 제각각이다.

법정에서 발언할 기회를 요구하는 청구인도 있고, '아버지에게 유죄를 선고한 그 법정에 가고 싶지 않다'며 출석을 꺼리는 청구인도 있다.

이명재씨 아들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

이씨 측은 이영진 부장판사가 다른 납북귀환어부 재심 재판에서도 같은 이유로 재판을 연기했던 사례가 있었던 만큼 이 부장판사의 재판 연기처분은 형사소송법을 위반한 결정이라고 보고 법관 기피 신청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씨 측은 형사소송법상 재심 결정이 확정되면 피고인이 사망자라고 하더라도 변호인이 출석한 상태에서 재판을 개정하고 심판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재판부의 결정이 위법하다고 주장한다.

최 변호사는 "납북귀환어부와 그 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법원이 청구인의 출석 의사와 상관 없이 재판 출석을 강제하고, 출석하지 않으면 재판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건 진실화해위의 권고를 저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재심 사건의 경우 일반 형사사건과 달리 무죄판결의 공시가 재량이 아닌 의무 사항이므로, 선고일에도 굳이 청구인이 출석해 의견을 내야 할 필요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동해안 납북귀환어부피해자시민모임은 지난 21일 대법원 누리집 '법원에 바란다'를 통해 진정서를 냈다.

이들은 "사망한 아버지의 무죄를 위해 유족이 피고인석에 강제로 서야 한다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법인지, 왜 50년이 지나도 유족들은 연좌제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사법부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

춘천지법 관계자는 "담당 재판부에서 피고인을 대신한 재심 청구인인 유족의 진술을 들어보고, 형사소송법 제440조 제2호에 의거한 무죄판결 공시 희망 여부 등을 파악하기 위하여 적법하게 재심 청구인의 출석을 요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죽은 아버지의 무죄를 위해 아들이 피고인석에 꼭 서야 하나요"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