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에(Kyrie)’는 2021년 낭독공연으로 발표되었다가 2년의 준비를 거쳐 이번에 정동극장 세실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설정이 참으로 독특하다. 연극이 아니고서는 구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30대 천재 한국인 여성 건축가가 숲 속의 집 한 채를 허물고 직접 설계해 짓다가 과로사한다. 그런데 이 여인의 영혼이 그 집에 깃든다. 영혼은 25년간 그 빈 집에 갇혀 있는데, 어느날 엠마라는 60대 한국인 전직 무용수가 근육이 굳어가는 병을 앓고 있는 남편과 말년을 보내기 위해 그 집을 사서 들어온다.

집 뒷편에는 검은 숲이 있는데 그곳은 죽으러 온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숲이다. 엠마는 그 집을 삶을 끝내기로 한 사람들이 결단의 순간까지 잠시 머무는 '에어비앤비'로 운영한다. 이윽고 예약 손님들이 하나둘 찾아온다. 물론 집의 영혼은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다.
꼭꼭 씹어먹고 싶은 찰진 대사...대본도 사고싶은 연극 ‘키리에'
꼭꼭 씹어먹고 싶은 찰진 대사...대본도 사고싶은 연극 ‘키리에'
여기까지만 듣고 과연 어떤 내용인지 상상할 수 있을까? 나 또한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미니멀한 무대는 어둡고 칙칙한데 혼령이라니 왠지 무서울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집’ 역할을 맡은 최희진 배우의 연기가 엄청 귀엽고 유머러스하다. 이를테면 영혼이 울면 집에 누수가 생기는데 엠마가 딱해서 ‘집’이 울면 엠마는 “이놈의 집은 맨날 누수야” 하고 불평하고, 그럼 집은 그게 미안해서 “미안해” 하며 눈물을 뚝 그친다.

집에 사람들이 찾아오며 스토리에 점점 살이 붙는데 첫 손님인 젊은 소설가 관수는 반려견을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낸 지 얼마 안된다. 그날 밤 ‘집’은 창 밖으로 주인을 찾아 온 개의 영혼을 알아본다. 엠마는 숲에서 난 버섯을 넣은 초콜릿을 간식으로 손님들에게 주는데 이 때문인지 그들은 숲에서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경험을 하게 된다. 관수는 숲에서 개의 영혼을 다시 만나 껴안고 행복하게 함께 뛰노는데 아마도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 감정 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젊은 여성 두 명이 검은 숲을 찾아오는데, 한 명은 살면서 희생만을 강요당했던 성직자이고, 다른 한 명은 한없이 자존감이 낮아 스스로를 학대했던 교직원이다. 이 둘, 분재와 목련 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나 훌륭하다. 윤미경 배우와 조어진 배우. 엠마 역의 유은숙 배우와 함께 기억해 둬야겠다.

자기혐오에 시달리던 분재와 목련 역시 숲 속에서 그 초콜릿을 먹고 희한한 경험을 한다. 마치 인터스텔라처럼 함께 시시덕거리던 전날의 자신들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게 참 귀엽고 예뻐 보이는 것이다. 목련이 분재에게 얘기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미래에서 본다면 예쁘게 보일지 몰라.” 이 장면에서 나도 울컥했다. 지금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이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등장 인물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관객을 위로한다. 거기에는 극작가 장영의 희곡 역할이 크다. 대사들이 찰지고 트렌디하면서도 깊이와 격조가 있어 대본집을 판매한다면 사고 싶을 정도이다. 꼭꼭 씹어 먹고 싶은 맛있는 대사의 향연이며, 외워 두고 싶은 잠언이기도 했다.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이를테면 “별일 없다고? 왜 사람들은 좋은 일은 별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나쁜 일만 별일로 여길까?” 같은 대사도 좋았다.
꼭꼭 씹어먹고 싶은 찰진 대사...대본도 사고싶은 연극 ‘키리에'
연극 ‘키리에’ 에서는 동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혼령과 사람이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살린다. 남편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엠마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한다. 그 순간 ‘집’의 영혼이 나서는데 이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말을 삼가겠다. 아, 나는 그 장면에서 오랜만에 감동받고 말았다. 아마 내년에도 이 작품 ‘키리에’는 어느 극장의 무대에 오르지 않을까 싶은데 그 때는 놓치지 말고 꼭 관람하시길 추천드린다. 때로는 이렇게 연극이 관객을 위로한다. 어쩌면 극장에도 어느 선한 영혼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