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김범수의 실험이 남긴 것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건 인간의 욕망이다.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개인들의 행동이 공공복리를 증진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법칙이 오랜 기간 세계 경제의 수레바퀴를 돌려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곳이 미국 실리콘밸리다. 가진 것은 아이디어뿐인 창업자도 억만장자가 될 수 있다. 그럴듯한 비전과 성공했을 때의 ‘과실’을 나누자는 조건을 내걸고 외부 투자를 유치하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스타트업이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으로 탈바꿈한다. 몸값이 비싼 A급 인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금 대신 스톡옵션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야심가들을 유치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식 모델 한국에 이식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는 실리콘밸리식 성장 방정식을 한국으로 가져온 인물이다. 김 창업자는 2007년 NHN(현 네이버)을 떠나며 “최고경영자(CEO) 100명을 성장시키겠다”고 밝혔다. 그의 다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김 창업자는 카카오 그룹을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처럼 운영했다. 도전정신이 충만한 인재들을 발굴했고, 이들에게 전적인 의사결정 권한과 스톡옵션을 약속했다. 본인은 ‘은둔의 경영자’를 자처하며 경영 일선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 창업자의 실험은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오너처럼 회사를 운영하는 ‘김범수 키즈’들의 활약 덕이었다. 2013년 16개에 불과했던 카카오 국내 계열사는 지난 6월 기준으로 146개로 늘었다.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난 것은 2~3년 전부터다. 경영진이 부적절한 처신으로 그룹에 악영향을 준 사례가 부쩍 늘었다. 카카오톡 서비스 장애 사태로 물러나면서 스톡옵션을 행사해 94억원의 차익을 챙긴 남궁훈 전 카카오 대표가 대표적이다. 급기야 최근엔 카카오가 SM엔터테인먼트를 합병하는 과정에서 주가 시세 조종에 나섰다는 혐의로 배재현 카카오 투자총괄대표(CIO)가 구속되고 김 창업자가 검찰에 송치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새로운 경영 모델 나올지 주목

김 창업자는 결국 지난 11일 임직원 간담회에서 카카오식 자율 경영 폐기를 공식 선언했다. “스톡옵션과 전적인 위임을 통해 성장을 끌어냈던 방식과 이별을 고해야 한다”며 자신의 실패를 자인했다.

카카오의 사례는 스타트업 단위에선 문제없이 작동하는 실리콘밸리식 성장 방정식이 계열사가 많은 그룹사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과 자신이 몸담은 소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영진을 통제하지 못하면 조직 전체가 흔들릴 수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세포가 활발히 분열하는 것은 ‘성장’이지만, 특정 조직의 세포만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분열하면 암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카카오는 13일 CEO를 전격 교체했다. 카카오벤처스를 이끌었던 정신아 대표가 김 창업자와 발을 맞춰 카카오 쇄신을 이끌게 됐다. 벤처캐피털처럼 그룹사를 운영해 위기에 처한 카카오가 벤처캐피털 CEO를 새로운 수장으로 뽑은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지금까지의 방식은 아니더라도 그룹과 오너가 중심을 잡는 전통 대기업 집단과는 다른 길을 모색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김 창업자와 정 신임 대표가 조직의 역동성과 안정성이란 고차방정식을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