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유자 왕 내한 리사이틀. (c)kyu L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유자 왕 내한 리사이틀. (c)kyu L
벨리 댄서를 연상시키는 '반짝이 미니스커트', 20㎝ 높이의 킬 힐, 보브컷 단발머리….

'클래식계의 연예인', '아이돌 같은 피아니스트' 유자 왕(36)은 첫인상부터 화끈했다. 예술의전당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옷차림으로 등장한 그에게 청중들은 귀 대신 눈을 먼저 열었다.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유자 왕 리사이틀이 일반적인 연주회와 다른 건 외모 뿐이 아니었다. 연주할 곡을 미리 공개하지 않고, 당일 프로그램북을 통해 알린 것도 그랬다. 그렇게 고른 곡들도 평범하지 않았다. 프랑스 현대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부터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까지 다양한 시대를 아우르는 곡들로 구성해서다. 공통점이 파격적이거나 즉흥적 요소가 충만한 작품들이란 점도 다른 공연에선 보기 힘든 대목이다.

1부의 첫 곡은 메시앙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시선' 중 15번과 10번이었다. 메시앙은 실험적인 작품과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을 많이 쓴 작곡가다. 15번은 피아니시시모(매우 여리게)로 은밀하게 시작되는 가운데 지속적인 불협화음으로 진행된다. '아기 예수의 입맞춤'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전반적으로 고요하고 성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곡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10번 '성령의 기쁨의 시선'은 타악기를 연상시키는 빠르고 리드믹한 작품이다.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인 가믈란 음악의 요소를 차용한 이 곡은 동양적이고 원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소 운동을 즐긴다는 왕은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화성 진행과 까다로운 테크닉을 요구하는 이 곡들을 수월하게 소화했고, 폭발적인 포르테부터 극도로 세밀한 작은 소리까지 폭넓은 다이내믹을 구사했다.

이어진 곡은 신비로운 화음과 서정적인 멜로디가 돋보이는 스크리아빈 피아노 소나타 7번 '하얀 미사'. 왕은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터치로 스크리아빈의 오묘한 색채를 표현했다. 바로 이어 파격의 아이콘이었던 드뷔시의 '기쁨의 섬'이 흘러나왔다.

너무 몰입했던 걸까. 차라리 한번 쉬고 연주를 이어가는게 낫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흘러가듯 연주가 진행됐고, 종종 소리는 날아가는 듯한 인상을 줬다.
유자 왕. (c)kyu L
유자 왕. (c)kyu L
2부에서는 쇼팽 발라드 4번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을 들려줬다. 발라드 4번은 쇼팽의 걸작으로 꼽히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이날 프로그램 중 가장 클래식 공연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왕은 여러 차례 반복되는 멜랑콜리한 주제 선율을 매우 다채롭고 감미롭게 보여줬지만, 특색있는 해석이나 확 눈에 들어오는 소리를 들려주지는 않았다. 예상과 달리 이 곡은 그저 '무난하게' 연주했다.

마무리 곡은 베토벤의 마지막 파아노 소나타인 32번. 베토벤의 시대초월적 감성이 담긴 이 곡은 감각적인 왕과 잘 어울렸다.

10여년전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연주를 통해 '유튜브 스타'로 떠오른 왕은 이후 화려한 속주와 묘기를 부리는 듯한 테크닉으로 인기를 이어왔다. 이날도 그랬다. 앙코르 연주 때 아이패드를 터치하며 악보를 넘기는 모습도 매혹적인 퍼포먼스로 보였다. 그렇게 왕은 이날 청중들의 '귀'보다는 '눈'을 즐겁게 해줬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