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조향사' 루이지와 RCO…따사로운 사운드에 추위도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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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악단 로열 콘세트르헤바우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서 공연
RCO만의 사운드로 객석 압도
리스트 곡 협연한 브론프만
환갑 넘어서도 녹슬지 않은 기량
이탈리아 명장 파비오 루이지는
유연하고 폭넓은 스펙트럼 보여줘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서 공연
RCO만의 사운드로 객석 압도
리스트 곡 협연한 브론프만
환갑 넘어서도 녹슬지 않은 기량
이탈리아 명장 파비오 루이지는
유연하고 폭넓은 스펙트럼 보여줘
따스한 광채와 투명성, 그리고 비르투오시티(연주 기교).
올해로 창단 135주년을 맞이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가 자부하는 미덕이다. 1895년부터 무려 50년 동안 이 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재임했던 빌렘 멘겔베르크(1871~1951)가 갈고 닦은 악단 고유의 사운드이기도 하다.
한 세기가 넘는 오늘날까지 이 사운드는 전략적으로 계승되어 왔다. 아카데미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악단에 적합한 단원들을 일찌감치 양성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전통을 훼손 없이 보존할 수 있었던 주요 하드웨어는 그들이 상주하고 있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홀이다. 악단보다 먼저 완공된 이 공연장의 어쿠스틱은 빈무직페라인잘과 최고 명성을 양분하고 있으며,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이곳에 가장 적합하게 조율되어 왔다.
따라서 기능적으로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악단이지만 멘겔베르크가 표방한 앞서 세 가지 미덕을 그들이 있는 곳 아무 데서나 음미할 수 없다. 특히 1996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의 내한 공연은 그들에게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리카르도 샤이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노베이션 이전의 세종문화회관은 악단의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심각하게 인색했다.
반면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지난 11일 공연은 악단의 속살을 모처럼 유감없이 발휘한 최고의 내한 공연 중 하나로 기록될 듯 싶다. 갑작스레 영하로 떨어진 날씨를 뚫고 공연장을 찾아온 청중들을 악단은 봄날의 화창한 햇살로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음악의 적정 온도를 조절한 것은 아시아 투어에 객원으로 나선 이탈리아 지휘자 파비오 루이지의 몫이었다. 자신만의 향수 브랜드를 가지고 있을 만큼 조향에 관심이 많은 그는 향기만큼이나 소리의 밸런스를 다루는 데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남다른 경력이 쌓은 루이지는 첫 곡 베버의 ‘오베론’ 서곡에서부터 짧고 굵게 방점을 찍었다. 오케스트라가 펼치는 오페라의 다양한 극적 효과들 속에서 청중들의 심장을 가로지른 건 비단결 같은 현악 파트에 실려온 아름다운 칸타빌레(노래하듯 연주)였다. 이어진 예핌 브론프만과의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은 청중들을 다른 방식으로 압도했다. 20세기부터 최고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자자했던 브론프만의 연주는 눈을 감고 들으면 환갑을 훌쩍 넘긴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한 테크닉으로 건반을 장악했다.
강력하고 풍성한 사운드로 오케스트라와 동등하게 대결할 때의 카리스마도 훌륭했지만, 사이사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음색으로 오케스트라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앙상블을 이룰 때는 그가 탁월한 실내악 연주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켰다. 사실 후자의 매력이 훨씬 월등했는데, 이는 테크닉이 이미 경지에 올라 굳이 미덕으로 내세울 필요가 없는 거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변화무쌍하고 엄청난 스케일의 협주곡을 마친 뒤에도 그는 슈만 ‘아라베스크’와 쇼팽의 ‘혁명’ 에튀드를 무심한 듯 연주하며 청중들의 뜨거운 환호에 답했다. 2부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에서 오케스트라는 국내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연주되는 ‘사골’ 레퍼토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청중들에게 그들만의 감동을 심어주었다. 루이지는 3악장 왈츠를 제외하고 시종일관 일반적인 연주보다 느린 템포를 설정했다. 다이내믹 또한 과하게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그는 악단이 본질적으로 품고 있던 소리의 스펙트럼을 최대한 폭넓게 과시할 줄 알았다.
금관 사운드까지도 절제하면서 조향사답게 소리의 밸런스를 유지하며 자극적인 소리를 억제하는 그의 지휘는 그럼에도 한 순간도 텐션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대부분 유려한 선율에, 혹은 감정의 극단적인 과잉으로 마무리되는 이 교향곡에서 그가 대신 추구한 것은 얄팍한 감정 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다양한 정서였다. 그 정서들의 표현은 목관 악기 주자들의 독주로 더욱 깊어졌는데, 단원들 개개인이 지닌 개성과 잠재력이 오케스트라와 탁월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2018년 다니엘레 가티가 상임 지휘자직을 사임한 이후 오랫동안 객원지휘 체제로 활동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 그들만의 ‘조화 속의 개성’은 각 파트 수석들의 보이지 않는 활약 덕분이기도 하다. 이번 내한 공연에서는 동아 국제 콩쿠르 1회 우승자인 리비우 프루나루를 악장으로 만날 수 있어 특히 반가웠다.
노승림 음악칼럼니스트
올해로 창단 135주년을 맞이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가 자부하는 미덕이다. 1895년부터 무려 50년 동안 이 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재임했던 빌렘 멘겔베르크(1871~1951)가 갈고 닦은 악단 고유의 사운드이기도 하다.
한 세기가 넘는 오늘날까지 이 사운드는 전략적으로 계승되어 왔다. 아카데미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악단에 적합한 단원들을 일찌감치 양성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전통을 훼손 없이 보존할 수 있었던 주요 하드웨어는 그들이 상주하고 있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홀이다. 악단보다 먼저 완공된 이 공연장의 어쿠스틱은 빈무직페라인잘과 최고 명성을 양분하고 있으며,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이곳에 가장 적합하게 조율되어 왔다.
따라서 기능적으로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악단이지만 멘겔베르크가 표방한 앞서 세 가지 미덕을 그들이 있는 곳 아무 데서나 음미할 수 없다. 특히 1996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의 내한 공연은 그들에게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리카르도 샤이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노베이션 이전의 세종문화회관은 악단의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심각하게 인색했다.
반면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지난 11일 공연은 악단의 속살을 모처럼 유감없이 발휘한 최고의 내한 공연 중 하나로 기록될 듯 싶다. 갑작스레 영하로 떨어진 날씨를 뚫고 공연장을 찾아온 청중들을 악단은 봄날의 화창한 햇살로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음악의 적정 온도를 조절한 것은 아시아 투어에 객원으로 나선 이탈리아 지휘자 파비오 루이지의 몫이었다. 자신만의 향수 브랜드를 가지고 있을 만큼 조향에 관심이 많은 그는 향기만큼이나 소리의 밸런스를 다루는 데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남다른 경력이 쌓은 루이지는 첫 곡 베버의 ‘오베론’ 서곡에서부터 짧고 굵게 방점을 찍었다. 오케스트라가 펼치는 오페라의 다양한 극적 효과들 속에서 청중들의 심장을 가로지른 건 비단결 같은 현악 파트에 실려온 아름다운 칸타빌레(노래하듯 연주)였다. 이어진 예핌 브론프만과의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은 청중들을 다른 방식으로 압도했다. 20세기부터 최고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자자했던 브론프만의 연주는 눈을 감고 들으면 환갑을 훌쩍 넘긴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한 테크닉으로 건반을 장악했다.
강력하고 풍성한 사운드로 오케스트라와 동등하게 대결할 때의 카리스마도 훌륭했지만, 사이사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음색으로 오케스트라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앙상블을 이룰 때는 그가 탁월한 실내악 연주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켰다. 사실 후자의 매력이 훨씬 월등했는데, 이는 테크닉이 이미 경지에 올라 굳이 미덕으로 내세울 필요가 없는 거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변화무쌍하고 엄청난 스케일의 협주곡을 마친 뒤에도 그는 슈만 ‘아라베스크’와 쇼팽의 ‘혁명’ 에튀드를 무심한 듯 연주하며 청중들의 뜨거운 환호에 답했다. 2부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에서 오케스트라는 국내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연주되는 ‘사골’ 레퍼토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청중들에게 그들만의 감동을 심어주었다. 루이지는 3악장 왈츠를 제외하고 시종일관 일반적인 연주보다 느린 템포를 설정했다. 다이내믹 또한 과하게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그는 악단이 본질적으로 품고 있던 소리의 스펙트럼을 최대한 폭넓게 과시할 줄 알았다.
금관 사운드까지도 절제하면서 조향사답게 소리의 밸런스를 유지하며 자극적인 소리를 억제하는 그의 지휘는 그럼에도 한 순간도 텐션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대부분 유려한 선율에, 혹은 감정의 극단적인 과잉으로 마무리되는 이 교향곡에서 그가 대신 추구한 것은 얄팍한 감정 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다양한 정서였다. 그 정서들의 표현은 목관 악기 주자들의 독주로 더욱 깊어졌는데, 단원들 개개인이 지닌 개성과 잠재력이 오케스트라와 탁월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2018년 다니엘레 가티가 상임 지휘자직을 사임한 이후 오랫동안 객원지휘 체제로 활동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 그들만의 ‘조화 속의 개성’은 각 파트 수석들의 보이지 않는 활약 덕분이기도 하다. 이번 내한 공연에서는 동아 국제 콩쿠르 1회 우승자인 리비우 프루나루를 악장으로 만날 수 있어 특히 반가웠다.
노승림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