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국립극장 제공
“집 떠날 때는 버들잎이 푸르렀는데 집 돌아가는 길, 흰 눈 날리네. 고향 돌아가는 길, 마음은 이리 바쁜데 굶주린 내 몸은 걸음을 떼지 않네.”

오강(烏江)을 건너지 않고 자결한 패왕(霸王) 항우를 우희의 혼령이 어루만진다. 한(漢)나라 병사들이 그 모습을 지켜볼 때 맹인 노파를 비롯한 여러 혼령이 나타나 노래한다. “천 년 동안 파도는 멈추지 않고 강변에 사람들은 한탄하네. 영웅은 어째서 강동으로 건너지 않고 죽음을 택했나!“

약 130분(인터미션 제외)간 진행되는 창극 ‘패왕별희’를 마무리하는 합창이다. 국립합창단 전 단원 등 출연진 47명이 거의 모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랐다. 혼성 2부 합창으로 부르는 민요조의 대합창이 공연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국립극장 제공
2019년 4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당시 ‘경극과 창극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다. 천카이거 감독, 장국영(장궈룽)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유명한 ‘패왕별희’는 중국 경극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초한지(楚漢志)의 백미로 꼽히는 ’패왕 항우가 애첩 우희와 이별하는 장면‘(패왕별희·覇王別姬)을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2019년 11월 재연(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 이어 4년여 만에 지난 11일 해오름극장에서 개막한 창극도 마찬가지다. 초연과 마찬가지로 경극의 현대화 및 재창작에 힘써온 대만의 우싱궈가 연출하고, 린슈웨이가 대본·안무를 담당했다. 소리꾼 이자람이 작창·공동 작곡하고, 음악감독도 맡았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국립극장 제공
결과물은 국립창극단이 기획한 의도대로 '경극을 품은 창극'이라 할 만했다. 대본부터 그렇다. 창극의 도창(해설자) 격인 맹인노파 캐릭터가 새롭게 만들어져 극의 서사를 이끌고, 중국 역사가 생소한 한국 관객을 위해 항우가 유방을 놔주는 '홍문연' 장면과 항우에게서 유방으로 돌아서는 한신 이야기가 추가됐다. 모두 경극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와 내용이다.

반면 '패왕별희' 장면을 하이라이트로 하는 경극 원작의 줄거리 뼈대는 같고, 의상과 분장, 소품과 손짓 등 동작과 안무도 경극의 요소를 많이 따랐다. 경극의 전통에 따라 우희 역을 남자 배우(김준수)가 맡은 것도 그렇다. 하지만 극의 서사를 전개하고, 주요 캐릭터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은 창(唱)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소리다. 연출가는 영상과 퍼포먼스의 결합 등 현대적인 무대 기법을 많이 사용한다. 이런 점은 경극과 창극의 특성으로 구분 짓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국립극장 제공
이번 무대는 '경극을 품은 창극'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연출가는 공연장이 512석의 중극장(달오름)에서 1221석의 대극장(해오름)으로 바뀐 만큼 '십면매복'과 '사면초가' 장면 등에서 병사들의 수를 늘려 화려한 깃발 군무와 전투 장면을 강화했다. 이들 장면뿐 아니라 전체적인 무대 동선과 군무 등이 초연에 비해 훨씬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변했다. 한층 웅장해졌다.

주역들의 연기도 훨씬 안정적이고 섬세해졌다. 정보권(항우), 김준수(우희), 유태평양(장량), 김금미(맹인노파), 허종열(범증·아부), 최용석(한신) 등 초연 및 재연 배우들이 이번에도 그대로 무대에 올랐다. 이들에게 초연 첫 공연에서 때때로 보였던 주저함이나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경극 특유의 손짓과 몸짓을 능숙하게 해내면서도 그 동작에 맞춘 소리도 거침없이 뻗어냈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국립극장 제공
연출가가 ‘한국의 메이란팡(중국의 전설적인 경극 배우)’이라고 호평했던 김준수는 더 원숙하게 우희 연기를 해냈다. 6장 ‘패왕별희’에서 항우 앞에서 홀로 양손에 칼을 들고 추는 검무를 끝내자마자 객석에선 여지없이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인 김준수가 무대에서 소리를 하지 않고 춤만으로 이런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 ‘패왕별희’ 말고 또 있을까 싶다.

회를 거듭할수록 더 완성도가 높아질 공연이다. 판소리 다섯 마당에 바탕을 둔 작품을 제외하면, 지난 8월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호평받은 ‘트로이의 여인들’등과 함께 국립창극단의 대표작으로 남을 만하다. 공연은 오는 18일까지.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