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국가주석(왼쪽)과 리커창 전 국무원 총리.  /EPA연합뉴스
지난 3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국가주석(왼쪽)과 리커창 전 국무원 총리. /EPA연합뉴스
지난 3월 퇴임한 ‘비운의 2인자’ 리커창 전 중국 국무원 총리가 27일 사망했다. 향년 68세.

이날 중국중앙TV(CCTV)는 상하이에서 휴식 중이던 리 전 총리가 심장마비로 27일 0시10분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리 전 총리는 2013년 3월 원자바오로부터 중국 국무원 총리직을 넘겨받아 지난 10년간 2인자 자리를 지켰다. 지난 3월 열린 양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리창 총리에게 자리를 넘기면서 퇴임했다.

1955년생인 그는 중국 최고 명문인 베이징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베이징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서기로 진로를 택하면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였다. 1993년 38세의 나이로 공청단의 최고위직인 중앙서기처 1서기(장관급)로 승진했다.

그는 과거 공청단 1서기를 지낸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의 총애를 받았다. 후 전 주석의 전폭적 지원 아래 지방정부에서 정치 경력을 쌓아나갔다. 1998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허난성 성장에 임명돼 행정 경험을 쌓았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랴오닝성 서기로 근무했다. 이 시기 리커창은 차기 국가주석 후보로 거론되는 등 대내외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혁명 원로인 시중쉰 전 부총리의 아들로 ‘금수저’였던 시진핑 국가주석과 달리 리 전 총리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흙수저’ 출신으로도 주목받았다. 시 주석과 리 전 총리는 최고지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하지만 2007년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은 서열 6위 부주석, 리커창은 서열 7위 부총리에 오르면서 후계 구도가 정리됐다. 당시 장쩌민 전 주석이 이끄는 상하이방과 후 전 주석이 이끄는 공청단 간 파벌 싸움이 격렬했고, 태자당(혁명 원로 자제 그룹)인 시 주석이 대안으로 떠오른 영향이었다.

리 전 총리는 2013년 시 주석이 최고지도자가 될 때 2인자인 국무원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시 주석 집권 1~2기 10년간 총리를 맡아 중국 경제 정책을 총괄했다. 시장주의자로 평가받는 그는 시 주석의 1인 지배 체제가 강화된 상황에서도 여러 차례 쓴소리를 하는 소신 행보를 보였다. 2022년 5월엔 “방역 지상주의가 경제를 망쳐선 안 된다”며 시 주석이 최대 치적으로 삼아온 ‘제로 코로나’ 정책을 직격했다. 2020년 전인대 기자회견에선 “중국 인민 6억 명의 월수입이 1000위안(약 18만원)에 불과하다”는 발언으로 ‘샤오캉 사회’(의식주 걱정 없는 풍족한 사회) 달성을 선언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이날 중국 소셜미디어(SNS) 웨이보에는 “인민의 좋은 총리, 인민은 영원히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등 수십만 건의 추모 글이 작성됐다. 일부 누리꾼은 위챗(중국의 트위터)에 “중국의 자유주의 시장 경제 개혁의 등대였다”며 “갑자기 등대가 꺼짐에 따라 자유주의 시장 경제 개혁이 끝났다”고 애도하는 글을 남겼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베이징=이지훈 특파원/신정은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