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기도'…70년대 소대장 시절 경험이 모티브
밀리언셀러 '인간시장' 첫 발표 후 42년…"죽는 날까지 정진할 것"
김홍신 작가 "이념갈등 여전히 심각…용서 없인 인류 생존 못해"
"용서가 없으면 인류는 생존할 방법이 없어요.

용서가 늦어지면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런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습니다.

"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 소설 '인간시장'으로 필명을 날린 이래 오랜 시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소설가 김홍신(76). 그가 이번에는 집단에 의해 부당하게 낙인찍힌 한 인간의 고뇌와 용서를 다룬 장편 '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로 독자들을 만난다.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 간담회에서 작가는 새 장편이 애도와 용서에 관한 소설이라면서 신작 소설의 핵심 주제인 용서의 가치를 강조했다.

소설은 주인공 한서진의 딸 자인이 아버지 한서진의 유고를 읽고 그의 삶을 추적해나가는 액자식 구성이다.

1971년 남북 대치가 극에 달하고 독재의 암운이 드리운 시절, ROTC(학군단) 출신으로 최전방 부대에서 복무하던 육군 소위 한서진은 작전 중 사살된 북한 장교의 시신에 십자가를 꽂고 명복을 빌어준 죄로 빨갱이로 몰려 군 형무소에 수감된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죽은 자에게 최소한의 예우를 했을 뿐이라는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붉은색 인간, 즉 '적인종'(赤人種)으로 매도된 채 가족들마저 잃게 된 상황에서 그는 오직 복수만을 생각하며 절치부심한다.

적군의 죽음에 최소한의 애도를 표한 한서진의 인류애는 보안대의 잔혹한 고문을 거치면서 실종돼 버리고, 분노와 좌절로 범죄조차 서슴지 않던 그가 용서의 가치를 서서히 깨우쳐가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킨다는 고금의 진실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이 소설은 분단 이후 1970∼8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이념과 진영 갈등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이데올로기 문제부터 시작해 좌우 갈등이 너무 심해졌어요.

한 집안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끼리도 서로 의견이 갈려 싸우고, 동네 친구들끼리도 정치적 갈등이 너무 심해졌지요.

요즘은 '빨갱이'가 그냥 흔히 하는 말이지만, 우리 젊은 시절만 해도 '빨갱이'라고 하면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었지요.

"
소설의 핵심 사건인 북한군 사살과 그에 대한 애도는 작가 자신이 육군 소위로 복무했던 1971년 당시의 실제 경험이라고 한다.

당시 최전방 사단의 경계부대 소대장으로 군 복무 중이던 김홍신의 부대는 그해 7월 1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날 새벽 육로로 침투하던 북한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김홍신은 당시 싸늘한 주검이 된 북한군의 시신 옆에 나무로 십자가를 깎아 꽂아놨는데 이 일로 보안대의 조사를 받게 된다.

김홍신 작가 "이념갈등 여전히 심각…용서 없인 인류 생존 못해"
소설 속 주인공 한서진 소위는 자신을 문책하는 보안대 수사관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사람이 죽으면 흙이 됩니다.

흙은 빨갱이도 적군도 아닙니다.

그냥 흙일 뿐이니 미워할 가치도 없습니다.

"(67쪽)
이 말은 작가가 당시 보안대 수사관들에게 직접 한 말이라고 한다.

작품 속 한서진은 이 일로 다해 빨갱이로 몰려 형무소에 수감되고 인생을 망쳐버리게 되지만, 김홍신은 조사를 받은 것 외에는 실제로 별다른 고초는 겪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겪은 직후 소설화를 구상했던 김홍신은 그러나 50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작품을 완성했다.

"당시 보안대 조사를 받으며 세상이 좋아지기 전에는 소설을 출간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군사독재 시기가 너무 길었지요.

곤란한 상황을 피하려고 작가가 계산을 하게 되면 작가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저 스스로 그런 함정을 피하려고 작품 집필을 계속 미뤘습니다.

"
여전히 원고지에 만년필을 꾹꾹 눌러가며 소설을 쓴다는 그는 이번 작품 역시 손 글씨로 써 편집자에게 보내 타이핑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김홍신 작가 "이념갈등 여전히 심각…용서 없인 인류 생존 못해"
"이번 소설을 쓰면서도 손에 마비가 왔는데, 한번 그러면 며칠간 글을 못 써요.

이어령 선생께서도 생전에 제게 컴퓨터로 글을 써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그게 잘 안됩디다.

"
암울했던 1980년대, 악의 세력에 대한 응징으로 당대 독자들에게 쾌감과 대리만족을 선사했던 장편소설 '인간시장'의 히어로 '장총찬'을 처음 선보인 지도 40년이 훌쩍 넘었다.

김홍신 역시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는 백발의 노인이 됐다.

작가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도 남을 기쁘게 하고 조금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살겠다는 기도를 하고 나왔습니다.

제가 이제는 원고 쓰는 속도도 느리지만, 죽는 날까지 정진하려고 합니다.

'인간시장'을 비롯해 제가 쓴 책들을 사랑해 주신 독자들께 보답하는 방법을 더 찾아보려고 합니다.

"
해냄출판사. 354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