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세 거장 스콜리모프스키 작품…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방랑하는 동물의 눈으로 본 인간 세계…영화 '당나귀 EO'
많은 동물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에 의해 운명이 좌지우지된다.

맛있어서, 아름다워서, 희귀해서 혹은 빠르고 튼튼하다는 이유로 값이 매겨져 이리저리 팔린다.

인간에게는 동물을 착취하고 상품화할 수 있는 천부권이라도 있는 걸까.

85세의 거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이 연출한 폴란드 영화 '당나귀 EO'는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이오(EO)라는 이름의 당나귀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인'이 바뀌던 이오가 자유의 몸으로 인간 세계를 방랑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이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1966)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이 작품은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 트로피를 가져갔다.

일부 평론가는 칸·베를린·베네치아 등 3대 국제영화제를 휩쓴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커리어 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영화에는 수많은 인간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오의 관점에서 대부분의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오의 일인칭 시점으로 인간 세계를 보여주거나 삼인칭 시점으로 이오와 주변 인물을 비추는 방식이다.

방랑하는 동물의 눈으로 본 인간 세계…영화 '당나귀 EO'
이오의 첫 주인은 서커스단원 카산드라(샌드라 지말스카 분)다.

이오는 자신을 아끼는 카산드라와 함께 무대에서 재주를 부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갑작스레 서커스단이 파산하면서 이오는 카산드라와 생이별한다.

이오는 영문도 모른 채 마구간으로 팔려 간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보다 더 비싼 종인 말들을 위해 수레를 끌고 짐을 옮긴다.

벌판을 달리고 목욕재계까지 하는 말들을 이오는 바라만 볼 뿐이다.

이오의 다음 집은 장애아동을 위한 농장이다.

아이들에게서 만져지는 게 이오의 쓰임새다.

어느 날 밤 이오는 얼떨결에 이곳을 탈출해 산을 넘는다.

다행히 사냥꾼의 총알도 비껴간다.

사냥꾼은 당나귀보다 값나가는 늑대를 노리기 때문이다.

무사히 도시에 도착한 이오는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축구 때문에 패싸움이 난 훌리건 무리를 만나기도 하고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하기도 한다.

새어머니와 의붓아들의 치정이라는 막장극의 관객도 돼 본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오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저 바람에 휘날리는 풀과 파란 하늘을 구경하고 카산드라와의 과거를 추억한다.

방랑하는 동물의 눈으로 본 인간 세계…영화 '당나귀 EO'
이오의 무해하고 순한 눈망울을 보다 보면 어느새 여릿한 죄책감이 똬리를 튼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평생 노동력과 생명을 바치는 동물은 이오뿐만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극 중 인간들은 위기에 처한 이오를 여러 차례 구해주기는 하지만, 누구도 그의 입가에 채워진 고삐를 풀어주지는 않는다.

안드리아 아널드 감독의 '카우'(2022),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감독의 '군다'(2022) 등 비슷한 최근작이 다큐멘터리인 것과 달리 '이오'는 극영화 형식을 통해 좀 더 드라마틱하게 한 축생의 애처로운 일대기를 보여준다.

초현실적이고 동화 같은 면이 강하긴 해도, 이오의 몸에 설치된 카메라를 이용해 그의 시선을 따라가도록 하면서 다큐멘터리의 느낌도 들게 한다.

이오의 울음과 거친 숨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면 잠시 당나귀가 된 듯한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몇 달 전 얼룩말 '세로'가 어린이대공원에서 탈출해 도심을 누빈 일도 떠오른다.

평생 갇혀 살던 우리에서 나와 인간 세계로 떨어진 세로는 이오와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10월 3일 개봉. 88분. 15세 이상 관람가.

방랑하는 동물의 눈으로 본 인간 세계…영화 '당나귀 EO'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