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 파산 손실 입은 국민연금, 수익률 선방한 비결은
애플·마이크로소프트·알파벳 등 빅테크株 집중 투자
1분기 6.35% … 그 중 해외주식 수익률만 9.7%
70년간 수익률 年 5.5% 유지땐, 기금소진 5년 미뤄져
지난 3월 중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민들의 노후 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공단이 SVB 모회사(SVB파이낸셜그룹)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우려가 나왔다.

국민연금이 SVB파이낸셜그룹에 직접 투자한 금액은 작년 말 기준 약 300억원(위탁운용 제외). 국민연금 적립기금(953조원)과 비교해 규모 자체는 작지만, 지난해 국민연금의 연간 수익률이 사상 최저치(-8.22%)를 기록한 가운데 ‘투자 실패’ 악재까지 겹치자 비판의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 참모들에게 “국민연금 기금운용 수익률을 높일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상황이었다.

70년간 수익률 年 5.5% 유지땐, 기금소진 5년 미뤄져

SVB 파산에 따른 손실이 있었지만 올 1분기 국민연금은 양호한 성적을 거뒀다. 1분기 국민연금 기금 수익률은 6.35%로 잠정 집계됐다. 해외주식만 따로 떼어 보면 수익률 9.7%로 국내주식(12.42%)에 이어 2위였다. 해외채권(5.38%), 대체투자(3.49%), 국내채권(3.25%)이 뒤를 이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상이 속도 조절에 들어갈 것이란 전망에 증시 전반이 강세를 보인 영향이 컸다. 특히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국민연금이 집중 투자하고 있는 빅테크 종목이 수익률 상승을 이끌었다. 지난 12일 애플은 뉴욕증시에서 사상 최고치를 찍었는데 이때까지 국민연금이 애플 주식을 매도하지 않았다면 주가 상승에 따른 수혜를 누렸을 것으로 관측된다.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건물 전경. 한경DB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건물 전경. 한경DB
이처럼 국민연금이 해외 뉴스에 울고 웃게 된 것은 적극적인 기금운용 필요성에 따라 해외주식 투자 비중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금운용 수익률을 높이면 재정적으로 보험료율을 높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2055년 기금 소진이 예고된 국민연금이 해외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다.

3월 국민연금 재정추계전문위원회가 발표한 5차 재정추계에 따르면 향후 70년간 기금 투자수익률이 기본 가정(연평균 4.5%)보다 1%포인트 높은 연 5.5%를 유지하면 기금 소진은 기본 가정 때인 2055년보다 5년 뒤인 2060년으로 미뤄진다. 수지적자 전환 시점은 2041년에서 2044년으로 늦춰진다. 이는 보험료율을 2%포인트 인상한 것과 같은 효과라는 설명이다.

국민연금공단은 2021년 1월 해외증권 투자 조직인 해외증권실을 해외주식실과 해외채권실로 분리하면서 해외 투자 확대에 팔을 걷어붙였다. 이에 따라 해외주식이 국민연금 기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커지고 있다. 1분기 말 기준 해외주식 투자 규모는 266조3000억원으로 전체 자산(953조1550억원) 대비 27.9%에 달했다. 국내채권(320조2330억원, 33.6%)에 이어 2위다. 부동산, 인프라, 사모투자를 아우른 대체투자(16.0%), 국내주식(14.7%), 해외채권(7.2%)이 뒤따랐다.

해외투자 비중 계속 늘려 장기 수익률 높일 것

국민연금은 장기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향후 해외투자 비중을 지속적으로 늘린다는 방침이다. 12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공개한 2024년도 국민연금 기금운용계획안에 따르면 내년 말 국민연금 자산군별 목표 비중은 해외주식이 33%로 가장 컸다. 그다음으로는 국내채권(29.4%), 국내주식(15.4%), 대체투자(14.2%), 해외채권(8.0%) 순이었다. 올해 말보다 해외주식 비중을 2.7%포인트 늘린다는 계획이다. 해외주식은 대체투자(0.4%포인트)와 함께 유일하게 비중을 확대하는 자산 유형이다. 반면 국내주식은 올해보다 0.5%포인트 축소한다는 방침이다.

해외주식은 국내주식과 마찬가지로 기금운용본부의 직접운용과 외부운용사를 활용한 위탁운용을 병행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직접 투자할 땐 시가총액에 비례해 기계적으로 종목을 매수하는 패시브(passive) 전략을 사용한다. 위탁운용 시엔 펀드매니저가 재량대로 종목을 사고파는 액티브(active) 전략을 펼친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을 비롯해 총 41개사(1분기 기준)가 국민연금의 위탁운용을 맡고 있다.

국민연금이 매수한 종목보니

그렇다면 국민연금이 집중 매수한 종목은 뭘까. 국민연금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운용보고서에 따르면 1분기 국민연금은 애플 주식을 51만2861주 사들였다. 애플은 국민연금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높은 비중(6.78%)을 차지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알파벳(구글의 모회사) 주식도 각각 26만3732주, 42만3164주 매수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알파벳 비중은 각각 5.23%, 3.22%다. 아마존(1.8%), 엔비디아(1.8%), 메타(옛 페이스북·1.33%), 테슬라(1.32%) 등이 뒤를 잇는다. 서학개미의 관심이 높은 빅테크 종목을 국민연금도 대거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애플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애플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포트폴리오 구성을 보면 섹터별로 정보기술(IT) 부문이 23.1%(2021년 기준)로 가장 많았다. 헬스케어(13.3%), 금융(12.8%), 임의소비재(12.3%) 등이 다음 순서였다. 지역별로는 북미가 64.9%로 압도적이고 유럽(18.3%), 아시아태평양(9.6%), 일본(4.5%) 등의 순서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업체인 대만 TSMC(0.83%),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0.53%), 프랑스 화장품 회사 로레알(0.25%) 등 지역별 대형주도 담고 있다.

외환당국은 해외주식 투자를 강화하는 국민연금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해외주식을 매입하기 위해 달러를 사들이면 원화 가치에 하방 압력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4월 국민연금과 350억달러 한도 내의 통화 스와프 거래를 체결했다. 국민연금이 한국은행을 통해 달러를 조달하기 때문에 서울 외환시장에서 직접 달러를 매입하는 수요를 줄여 환율 안정을 꾀할 수 있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국민연금의 향후 5년간 중기자산 배분을 결정하는 실무평가위원회와 기금운용위원회에서 ‘국민연금의 해외투자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해외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리겠다는 입장이다. 국민연금이 외환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