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의 면담 제안 왔으나 거절…노동운동 망할까봐"
"주체사상 10쪽도 읽을 수 없었다…같은 말만 계속 반복"
"북한인권에 대한 외면은 도의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삶-특집] "한반도 8천만명중 3천만명은 6.25 전쟁이 북침인줄"
"나는 덴마크 주재 북한 대사관에 있을 때 여러 자료를 보고 6.25전쟁이 남침인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모두 북침으로 알고 있죠"
탈북 정치인 태영호가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북침은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는 뜻이다.

북한에서 엘리트로 성장했던 태영호 같은 사람마저 6·25전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으니 북한의 거의 모든 주민(2천700만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삶] 인터뷰이들의 상당수는 북한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남북 분단 자체가 우리 민족의 수치인 데다 그 고통이 크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전범 국가인 일본은 분단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도 피해국인 대한민국이 외세에 의해 분단된 지 80년 가까이 됐다.

6·25전쟁 과정에서는 남북한에서 3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숨졌다.

그 후에도 남북 간 크고 작은 갈등과 충돌로 계속 사람들이 죽었고, 민족의 에너지는 낭비됐다.

연합뉴스는 작년 9월부터 [삶] 인터뷰를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이 인터뷰에 참여한 각계 인사는 30명이다.

아래는 그동안 [삶] 인터뷰이들이 북한 문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추려서 엮은 것이다.

[삶-특집] "한반도 8천만명중 3천만명은 6.25 전쟁이 북침인줄"
탈북 국회의원 태영호(60.국민의힘)는 6·25전쟁이 남침이라는 것을 덴마크에서 북한 외교관으로 일할 때 여러 책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그는 "북한 주민들 대부분은 6.25전쟁이 북침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북한 사람들이 외국에 나와서 충격을 받는 것 중 하나는 6·25전쟁을 김일성이 일으켰다는 점"이라고 했다.

태영호는 "1997년께 덴마크 사무실에서 '태백산맥'이라는 영화를 동료들과 함께 봤다"면서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남로당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영화가 나올 수 있는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남한 자유민주주의 스펙트럼이 이런 정도까지 수용할 정도로 큰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는 "영화에서 김범우(배우 안성기)가 남로당 보성·벌교 위원장인 염상진(배우 김명곤)에게 '당신들의 혁명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이념은 훌륭하지만, 인간 생명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와닿았다"고 했다.

[삶-특집] "한반도 8천만명중 3천만명은 6.25 전쟁이 북침인줄"
조갑제닷컴의 대표 조갑제(77)는 자국 국방이 안 되는 현실에 대해 답답해하는 사람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이 비겁하다고 했다.

조갑제는 "북한이 핵무장을 하면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면서 "무슨 일만 있으면 한국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니 김정은이 한국을 만만하게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경제력은 북한의 100배나 되는데, 외국 도움까지 받고서도 북한과 싸우는 것에 겁낸다면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정신을 가진 나라가 아니냐"면서 "한미동맹이 좋은 점이 있으나 그 부작용으로 한국의 정신이 좀먹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은 아랍과 싸우면서 지금까지 미군의 (직접적) 도움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면서 "이스라엘은 자국에 미군이 주둔하는 순간, 국민이 타락할 것으로 본 것"이라고 했다.

조갑제는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는 상황에서 자주국방도 이뤄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면서 "(미군이 주둔하면) 사람의 속성상 사대주의로 가거나 의존적으로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점에서 한국의 보수는 보수라고 말할 자격이 안 된다"면서 "자위적 핵무장 이야기를 10년 전, 20년 전에 이미 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삶-특집] "한반도 8천만명중 3천만명은 6.25 전쟁이 북침인줄"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고문(59)은 대학생 시절에 남한에 북한의 주체사상을 공급한 사람이다.

1991년 밀입북해 묘향산에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 1992년에 지하당인 민족민주 혁명당(민혁당)을 만들었다.

그런 그가 1990년대 중반부터 방향을 바꿔서 북한민주화운동에 나섰다.

이 운동은 북한 정권 붕괴를 목표로 한다.

그는 1999년에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중국에서 이 운동을 하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김영환의 방향 전환은 북한 체제가 바람직한 사회 모델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소련, 동유럽 등 과거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가 그의 사상을 뿌리째 흔들었고, 북한의 비참한 실태가 그의 새 신념을 굳혔다.

그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의 실태가 참혹했고 어마어마한 분노가 일어서 참을 수 없었다"면서 "이런 끔찍한 체제를 방관하는 것은 양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북한 민주화운동에 나섰다"고 말했다.

김영환은 "좌파 진영이 북한 주민 인권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정치적으로) 강경 주사파와 척지기 싫어서 그러는 측면이 크다"면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우파에 대한 굴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그는 "일부 좌파 진영 사람들은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한반도에 혼란만 심해지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서 "혼란을 고려해서 잔혹한 독재정권을 못 본 척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삶-특집] "한반도 8천만명중 3천만명은 6.25 전쟁이 북침인줄"
진중권 광운대 교수(59)도 김영환처럼 사상을 바꾼 사람이다.

그는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에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주의를 지향했으나 독일 유학 등을 거치면서 사회민주주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영환처럼 전 세계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역사적 현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진중권은 "내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사회주의가 시대정신이었다"면서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 몰락 이후 독일에 가보니 유일하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유럽의 모델이었다"고 했다.

그 모델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사회주의 개념이 결합하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 자율주의, 생태환경주의가 우리가 지향할 방향이라고 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사회주의가 아닌 봉건왕조라고 평가했다.

그는 "내가 대학 다닐 때, 운동권의 한 계열이었던 PD(민중민주)는 정통을 지향했으나 NL(민족해방)은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것은 우민화이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면서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을 계몽시키고 각성시켜서 인텔리로 만드는 것인데. NL은 멀쩡한 인텔리마저도 우매한 대중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는 "NL 관련자들은 반성이 없었고 교정이 진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적으로 게으른 것"이라고 했다.

[삶-특집] "한반도 8천만명중 3천만명은 6.25 전쟁이 북침인줄"
젊었던 시절에 세상을 좀 더 개선하려는 열정, 사회주의 정책이 가진 장점 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의견도 있다.

권영길 전 민노당 대표(81)는 오랫동안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 숨졌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삶]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존경받는 인물이었다고 소개했다.

권영길은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북으로 철수할 때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돌아가셨다"면서 "아버지는 생전에 마을 이장을 했고, 초등학교 설립 운동을 주도하셨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면서 "마을 할머니들이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만나면 '너의 아버지는 정말로 훌륭한 분이었다, 생각 바르고 모든 사람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고, 그 이후 삶도 그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에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인류사회가 사회주의로 인해 삶이 질이 개선됐으며, 한국도 사회주의를 지향한 민노당의 활동으로 정치, 경제, 사회에 개혁바람이 일어났다고 했다.

권영길은 "주5일제 근무, 재벌개혁, 소득 평등 추진도 민노당이 투쟁하고 선도한 결과"라면서 "유럽에서는 좌파와 우파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면서 사회주의 정책들이 유지됐고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민주당은 진보당이 아닌 보수당"이라면서 "언론들도 민주당을 진보당이라고 하는데, 이 자체가 한국 정치의 비극이자 모순"이라고 했다.

[삶-특집] "한반도 8천만명중 3천만명은 6.25 전쟁이 북침인줄"
'영원한 재야' 장기표(77)는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다.

여전히 현실정치의 대안을 만들고, 이를 알리는데 열정적이다.

그는 주체사상에 함몰되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장기표는 "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배운 것이 많이 있지만, 사회주의에 빠진 적은 없다"면서 "특히 북한의 주체사상에 경도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주체사상을 읽어봤는데, 10페이지도 넘길 수가 없었다"면서 "똑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나의 동년배 운동권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한다', '주체사상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나는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를 반대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장기표는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평등을 지향하고, 다 같이 잘살게 하자는 취지여서 젊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북한이 잘사는 나라가 됐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런 사회경제 시스템을 지향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북한은 자유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보정당에 있는 사람들, 좌파 진영에서 유명한 사람 중에는 사회주의가 잘못됐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삶-특집] "한반도 8천만명중 3천만명은 6.25 전쟁이 북침인줄"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70. 전 민주당 국회의원)은 노동운동에 북한이 개입되는 것을 경계했던 인물이다.

그는 1989년 영국으로 유학하러 갔을 때 북한에 가자는 제안이 있었다고 했다.

스위스 등을 통해 북한에 갔다가 오면 아무도 모른다면서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1989년 4월 독일 금속노련 초청으로 독일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인들의 초청으로 저녁을 먹게 됐는데, 그들은 방북을 제안하면서 김일성과 일대일로 만나는 약속이 돼 있다고 했으며 그 날짜와 장소까지 알려줬다고 했다.

전순옥은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북한에 다녀올 수 있다고 했다"면서 "그러나 그런 행위는 한국의 노동운동을 망치는 행위여서 거절했다"고 말했다.

전순옥은 1988년도에 일본연합노조 초청으로 일본에 순회 강연하러 갔을 때도 재일교포(조선총련) 쪽에서 돈을 주려는 시도가 있었고 했다.

그는 "박스를 선물로 받았는데, 손수건 아래로 돈뭉치가 있었다"면서 "돈을 돌려주고 엄중히 경고했는데도 나중에 식당에서 돈을 건네는 사람이 또 있어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고 전했다.

[삶-특집] "한반도 8천만명중 3천만명은 6.25 전쟁이 북침인줄"
남북 화해와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많다.

현정화 한국마사회 탁구 감독(53)은 본인 인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해 우승한 것을 꼽았다.

그는 "북한 리분희 선수의 첫인상은 도도했는데, 그가 북한에서 탁구 엘리트로 성장했기 때문"이라면서 "나는 그보다 한 살 어린 데다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언니라고 부르면서 따랐고, 결국 친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당시 우승으로 나는 작은 통일을 이룬 듯했다"면서 "남북한이 서로 체제를 인정해주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현정화는 2024년 부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수석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북한이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국제탁구연맹(ITTF)에 도움을 요청해놓은 상태라고 했다.

[삶-특집] "한반도 8천만명중 3천만명은 6.25 전쟁이 북침인줄"
국제 긴급구호 전문가 한비야(64)는 세계 곳곳에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준 사람이다.

때로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에도 위기에 빠진 사람들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정작 동포인 북한 주민을 지원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한비야는 "지난 20년간 북한에 홍수도 나고, 가뭄도 발생해서 국제구호팀이 반드시 출동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국제 긴급구호는 재난 발생지가 어느 나라든 상관없이 생명을 살리는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이 대원칙"이라면서 "그 나라의 이념과 상관없이 재난을 당한 주민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