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뮌헨 음대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공부하다가 2014년부터 지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2017년까지는 여러 작곡 대회에 출품하며 작곡에 집중하였으나 2018년부터는 지휘에 더욱 비중을 두었습니다.

마침 그 시기 연속으로 새로운 지휘과 교수님 두분이 오셨는데, 보통 독일 지휘과 교수님들은 지휘자로서 활동을 그만두거나 활동을 현저히 줄이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 집중하는 반면, 뮌헨 음대의 새 지휘 교수 두분은 현재까지 수십년간 여러 악단의 음악 감독 및 상임 지휘자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십니다.

너무 바쁘신 탓에 불규칙적으로 수업하거나 짧은 시간에 몰아서 수업을 하게 됐고, 체력적으로나 집중력 면에서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두 현역 지휘자로부터 배운 건 제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두 분 덕분에 지휘자의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빠르고 많이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지휘자로 먹고사는 일은 '복권 당첨'과도 같다
지휘과 수업은 보통 레슨실에서 피아노 두대 정도(2-4명)을 지휘하며 작품들을 공부하고 준비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타이밍과 소리가 너무 상이하고, 또한 이 형식의 수업만으로는 5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소통하며 음악적으로 설득시키는 방법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러한 수업에서 배운 것만으로 지휘자가 되는 것은 백사불여일행으로, 마치 젊은 피아니스트가 반주 연습도, 연주 경험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리허설 경험도 없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곧바로 무대에 올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참에 자세히 설명을 드리자면, 피아노는 건반악기, 즉 타악기이기에 연주 타이밍이 빠르고 직설적인 반면 오케스트라는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및 모든 각각의 악기들이 다른 타이밍을 가지고 있기에 함께 음을 만들어내는데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게다가 오케스트라마다, 연주회장마다, 작품마다, 미묘한 시간차가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휘자를 보며 생각하는) 지속적으로 정확히 박자만 저어주면 된다는 생각, 즉 메트로놈 같은 지휘는 현실적으로 오케스트라 앞에선 옳은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수십명이 각기 다르게 느끼는 미묘한 시간차와 음악적 해석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화합을 이루도록 이끄는게 지휘자의 몫입니다.

이런 요소들을 느끼고 통달하려면 그만큼 프로 오케스트라와의 경험이 중요한데,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지휘과 학생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프로 오케스트라를 투입하는 등의 재정적 여력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외부 마스터 클래스들은 평범한 학생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가격이 비쌉니다. 그래서 수많은 지휘과 학생들은 수년간 공부를 하며 학생 오케스트라만 가끔 지휘해보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아예 오케스트라 지휘를 못해보고 졸업하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뮌헨에는 오랜 활동을 통해 쌓은 수많은 인맥 및 뛰어난 재정관리 능력, 협상능력을 가진 두명의 현역 지휘자가 교수직을 이행하시고 있기에, 당시의 저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학생들이 다양한 오케스트라 앞에서 리허설을 해보고, 정식 연주 기회도 많이 받았습니다. 게다가 완전히 무료로요! 기회가 오죽 많았으면 학생 신분으로 프로 오케스트라 앞에 선다는 그 꿈 같은, 황금같은 기회가 가끔 질릴 정도였으니까요. 상상도 못할 "나 안할래, 너 할래?"가 학생들 사이에서 빈번히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분 모두 독일 극장의 음악감독이자 상임지휘자이시기에 여러 극장과 페스티벌에서 부지휘자 혹은 오페라코치(반주자)로 채용돼 실제상황을 많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실용적인 경험을 통해 자잘한 '실패와 성공'(시행착오)을 직접 겪으며 저는 궁극적으로 각기 다른 오케스트라 앞에서 나의 어떤 자세(지휘)가 설득력이 있을지, 어떤 인상을 주어야할지, 어떤 말을 해야할지 등을 일찍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음악관, 지휘에 관한 자세한 생각은 다음 글에 말씀드리기로 약속하고, 독일에서 지휘자가 되는 과정 두어개를 서술하며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독일에서 지휘자로 먹고사는 일은 '복권 당첨'과도 같다
독일 교향악의 세계에는 크게 보면 두가지 종류의 악단이 있습니다. 교향악단과 극장입니다. 독일은 오페라극장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이기에,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극장에서 일을 시작해 차근차근 승진을 하며 경력을 쌓아나갑니다. 극장 지휘자로는 크게 네개의 직종이 있는데요, 보통 경력 순서대로 Korrepetitor(오페라 코치/반주자)-Kapellmeister(수석/상주지휘자)-Generalmusikdirektor(음악감독)가 있고, 그 사이 어디엔가 리허설 스케쥴, 라인업, 반주 등을 대표로 총괄감독하는 Studienleiter라는 직업도 있습니다.

물론 극장마다 각각의 사유로 두가지의 직종을 합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Korrepetitor mit Dirigierverpflichtung(지휘를 필수로 해야하는 반주자), Kapellmeister mit Korrepetitionsverpflichtung(피아노 반주의 의무가 있는 상주지휘자), Kapellmeister und Studienleiter(상주지휘자이자 리허설 총괄감독), Kapellmeister und stellvertretender Generalmusikdirektor(상주지휘자이자 부음악감독)이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독일에선 위에 명시한 순서대로 '반주자→수석·상주 지휘자 혹은 총괄감독→음악감독 혹은 상임 지휘자'의 길을 통해 지휘자가 됩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안정적인 길입니다.

극장 지휘자는 무대 뒤에서의 작업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평균 6주의 리허설 기간 중 피아노반주를 동반한 연출 리허설 4주,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리허설 1주, 그리고 나머지 일주일은 휴식을 동반하며 5시간이 넘는 메인 리허설(Hauptprobe)과 최종리허설(Generalprobe)을 하고 금요일이나 주말에 초연을 하는 방식이죠.

오페라코치·반주자는 첫 4주 내내 리허설에서 성악가들을 반주하거나 피아노 반주를 지휘합니다. 이후엔 공연을 맡은 수석지휘자 혹은 음악감독(상임지휘자)이 마지막 2주동안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을 지휘합니다. 이 시기 대부분 오페라 코치는 다음 작품 준비를 시작하죠. 슬프게도 오페라 코치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일을 하고도 무대에 오르지 못합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공연에서도 지휘자는 반지하의 Graben에서 지휘를 하기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극장 지휘자는 대부분 시각적이고 열정적인 요소는 최소화하고 길고 복잡한 오페라가 큰 문제없이 잘 연주될 수 있게 실용적으로 지휘를 합니다.

하지만 이 보통의 안정적인 길을 통해 음악감독 혹은 상임지휘자가 되려면 짧아도 10년, 길면 25년이 걸릴뿐더러 많은 경우 반주자 혹은 수석지휘자로 커리어를 마감하기도 합니다. 음악감독 직책까지 맡더라도 교향곡 지휘에 좋은 평판을 쌓지 않은 이상 극장 외의 다른 교향악단에서 상임지휘자(Chefdirigent: 극장의 Generalmusikdirektor와 다름)가 될, 혹은 객원으로 지휘할 기회가 적습니다. 왜냐하면 이 독일 극장 시스템은 독일에 한정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극장 소속이 아닌 다른 교향악단들은 지휘자에게 다른 퀄리티를 요구하기 때문이죠.

교향악단의 공연에서 지휘자는 극장에서와 달리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지휘를 합니다. 그러기에 실용적이고 간단명료한 지휘보다는 단원들과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들을 매료하는 열정적인 지휘를 많이 선보입니다. 교향악단들의 단원들과 대표들도 그러한 지휘자들을 선호하고 초대합니다. 독일의 수많은 극장에 수많은 매우 뛰어난 오페라 지휘자들이 있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이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같은 유명한 교향악단의 라인업에는 그들의 이름이 거의 없는 이유이기도 하죠.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고요.)

결론적으로 독일에서 극장 지휘자가 되는 길과 교향악단 지휘자가 되는 길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는 길이 극장 지휘자가 되는 것보다 희소합니다. 그리고 훨씬 불안정하기도 하죠. 현재 독일 유명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지휘 콩쿠르를 통해서나 대가들의 조수·부지휘자를 하며 큰 경험과 인맥을 쌓아 좋은 매니저나 단장을 소개받고 그들의 눈에 띄어 동아줄 같은 기회를 잡아 경력을 쌓아온 분들입니다. 복권과도 같은 길입니다.

저는 두개의 극장, 두번의 페스티벌에서 부지휘자 및 오페라 코치로 잠깐씩 일하였고, 이후 독일 동북쪽 메클렌부르크 주립극장 & 노이브란덴부르크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Kapellmeister)를 역임하였습니다. 독일에서 지휘자로서 안정적인 보통의 길을 가고 있었죠.

그러나 팬데믹이 왔고, 음악적 완성도보다 실용성이 강조된 극장 생활에 지쳐 다른 길, 불안정안 길을 택했습니다. 2021년 사표를 내고 여러 대회에 참가하였으며, 지난해 기쁘게도 한국의 좋은 오케스트라들과 좋은 공연을 많이 하였습니다. 통영에서 KBS교향악단과 김유빈 플루티스트와의 연주, 국립심포니와 박재홍 피아니스트, 오종성 작곡가와의 교향악축제, 그리고 한경아르떼필하모닉과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한 브람스 4번이 다행히도 멀리까지 좋게 소문이 나서, 생각보다 훨씬 일찍 좋은 매니지먼트와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마냥 잘생기지도, 입담이 화려하지도 않은 제가 세계 최고의 지휘자들과 음악가들이 모여있는 영국의 아스코나스홀트와 계약한 것은 영광이자 이 불안정한 길에서 정말 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새로운 시작일 뿐이고, 아직 갈길이 멀다고 느낍니다. 저의 불안정한 길에 함께 동행하기로 해주신 분들께 반대로 제가 당첨된 복권 자체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