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Mio Casta Diva (오 나의 정결한 여신이여) .

내 주변엔 직계 가족은 물론 사돈의 팔촌 가운데도 음악 전공은커녕 조금이라도 클래식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다. 그저 내 울림통이 괜찮다는 자신감에 ‘세계적인 콜로라투라는 조수미다’라는 등식만 외우고 용감하게 음대에 들어갔을 뿐이다. 하지만 조금씩 음악을 배워가면서 영상으로 만나기 시작한 프리마돈나들의 무대는 그야말로 신성한 신세계였다.

사람인지 인형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가슴을 설레게 했던 전성기 시절 나탈리 드세이, 주인공이 뻔히 죽는 걸 아는데도 기적처럼 낫길 응원했던 안나 네트렙코, 2002 한·일 월드컵 기간에 당시 남편 로베르토 알라냐 손을 잡고 ‘부부사기단’으로 내한했던 안젤라 게오르규….

다들 어쩌면 이렇게 멋지고 노래까지 잘하는 것인지. DVD 영상으로 접한 비디오 시대의 이들 프리마돈나와 오페라 스타들은 내가 꿈꿨던 장래 희망이 노래만 잘 불러선 될 수 없다는 벽을 느끼게 했다.

그들의 가창력도 마찬가지다. 실제 공연을 들어볼 수 없는 마리아 칼라스, 조안 서덜랜드, 몽셰라 카바예 같은 오디오 시대 ‘할머니 대가’들과 별 차이가 없는 천상의 목소리였다.
오, 영원히 늙지 않는 '나의 여신' 담라우!
담라우와의 첫 만남

그러던 중 진짜 중의 진짜를 만났다. 디아나 담라우였다. 2006년 뉴욕 메트오페라 오케스트라 반주로 노래한 번스타인 오페레타 <캔디드>의 백작 딸 퀴네공드 아리아 영상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이 영상을 가끔 찾아보지만 언제나 처음 본 순간처럼 놀란다. 영상 속 그녀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담라우는 어느덧 사라지고 퀴네공드만 남는다.

2018년 뉴욕 메트에서 열린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도 담라우를 더욱 사랑하게 만든 오페라다. 비올레타로 분장해 죽기 직전 재회한 전 남친 알프레도(후안 디에고 플로레즈 역) 품에 안긴 담라우.

흔들리는 동공과 떨리는 입술로 파리로 돌아가자며 플로레즈와 이중창 부르던 그녀의 영상은 안나 네트렙코의 리즈 시절 속옷 차림에 롱코트 걸치고 롤란도 비야존 품에서 죽어갔던 그 비올레타와는 감정 연기 자체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올 초 <아르떼> 사이트를 준비하면서 주요 공연장들의 스케줄을 정리하던 중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가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담라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손꼽아 기다리던 5월 18일은 그렇게 다가왔다.

이번 공연은 소프라노 담라우와 남편인 베이스 니콜라 테스테가 <오페라의 왕과 여왕>이라는 타이틀로 기획한 순회 공연이다. 2022년까지 독일 바덴바덴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로 활동한 파벨 발레프가 아시아 투어의 지휘를 맡았고 서울에선 63인조 KBS교향악단의 지휘봉을 잡았다.

이들은 싱가포르와 홍콩 대만을 들러왔다. 이미 세 차례나 리허설을 한 셈이다. 그래서 신뢰가 갔다. 프로그램만 봐도 담라우가 얼마나 현명하게 나이 들어가는지, 또 언제까지 무대에서 노래하기를 원하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도 대가들의 발자국을 따라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람의 목소리는 영원할 수 없다. 성대도 주름이 생기고 피부처럼 노화가 온다. 젊고 싱싱한 성대로 극한의 고음을 내야만 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다른 성부의 성악가보다 ‘연주 수명’이 짧은 것은 자연스럽다.

조수미를 처음 만난 지휘자 카라얀도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이 목소리를 자동 소총처럼 쓰게 만드는 위험한 역할”이라며 출연을 만류하질 않았던가. 담라우는 누구보다 밤의 여왕(Queen of the Night)의 아리아를 가장 잘 불렀고, 누구보다 많은 버전에 출연했다.

KBS교향악단의 연주로 로시니 <세미라미데> 서곡이 끝나자 드디어 기다리던 담라우 차례다. 여왕의 등장이다. 관객들의 박수는 기대만큼이나 처음부터 우렁찼다. 관객들이 보낸 환대에 담라우도 다소 흥분됐는지 첫 곡부터 객석으로 바짝 걸어나와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첫 곡부터 꽤나 시원하게 소리를 내줬다. 바빌로니아 여왕 세미라미데 역으로 공연을 시작한 그녀는 첫 곡에서부터 로시니 특유의 까다로운 스케일을 한 호흡으로 넘어가듯 쉽게 노래했다.

그 순간 나의 기억은 과거로 돌아갔다. 2012년 어느 날 도이치오퍼 베를린에서 본 도니제티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길지 않았던 독일 생활에서 직접 본 오페라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그날은 웬만한 비에는 좀처럼 우산을 쓰지 않는 독일 신사들조차 큰 우산을 들고 공연장에 들어왔을 정도로 소낙비가 내렸지만 객석은 만석이었다. 공연 시간이 넉넉히 남았지만 클록룸 내부에는 일찌감치 긴 외투들이 커튼처럼 걸렸고 카페테리아의 샴페인은 금세 동이 나버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페라 연출과 의상은 올드했고 극장의 어쿠스틱도 답답했다. 주인공 루치아 역의 담라우가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미쳐버리기 전 루치아가 부르는 아리아 를 부르던 담라우의 가창력과 연기는 의상과 연출에도 인공호흡을 불어 넣으며 무대를 천상의 그것으로 변신시키고 말았다. 매력적인 음색은 장면의 감정마다 색깔이 다 달랐다.

그날 나는 오페라 가수라는 직업은 가창 능력보다 암기력과 감정 연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나의 진로에 대한 높은 벽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에드가르도 역을 맡은 테너 요제프 칼레야 대신 무대에 오른 자랑스러운 한국의 테너 강요셉도 뾰족하고 날카로운 피치의 고음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담라우와 요셉 강의 이중창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색이 바랜 티켓을 불과 얼마 전까지도 서랍 속에 보관해왔다.

담라우의 ‘정결한 여신이여’

다시 롯데콘서트홀. 루치아를 부르지 않아도 담라우의 클래스는 여전했다. 담라우는 이번 아시아 투어 직전인 지난 4월 독일 바덴바덴 축제에서 키릴 페트렌코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를 공연했다.

6월 17일에는 오스트리아 빈 무지크 페어라인에서 틸레만의 지휘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콘서트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카프리치오(Capriccio)>의 음악을 노래한다.

12월 독일 뮌헨 바이에른 오페라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콘서트 무대에만 오른다. 그녀의 행보는 오페라보다는 콘서트에 무게가 실린다. 성악가로서는 전성기가 지났다는 얘기다.

2010년 테스테와 결혼한 그녀는 두 아들을 낳았다. 출산 이전의 전성기에 비하면 음성은 낡았지만 음악은 더 성숙했다. 그녀의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첫 음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곡 벨리니 오페라 <노르마>의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Casta Diva)’. 백성들에게 신탁을 전하는 여사제 노르마는 부족의 원수 로마 총독 폴리오네와의 금지된 사랑으로 두 아이를 낳았고 노르마는 달의 여신에게 백성들의 분노를 진정시켜달라고 기도한다. 두 아이의 엄마 담라우는 마치 자신이 노르마가 된 듯 자신의 인생을 담아 혼신을 다 해 노래했다.

가성과 진성을 오가는 그의 긴 호흡은 호소력 짙었고 관객들을 무대로 빨아들였다. 가성의 피아니시모로 시작해 진성의 포르테까지 단숨에 불어내는 벨칸토 ‘테크닉 메차 디 보체(Mezza di Voce)’로 노래한 그녀의 독백은 애잔한 음색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독백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담라우는 역시 나의 프리마돈나였다.

그녀의 남편 니콜라 테스테는 흡사 영화배우 같은 외모의 훌륭한 매너의 소유자였지만, 미안하게도 나의 기억에는 없는 인물이다.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는 거북할 정도는 아니지만 ‘코창력(비강)’을 많이 쓴다는 느낌이다.

담라우 부부는 모두 네 곡의 앙코르 곡을 들려줬다. 남편 테스테가 베르디의 작품을 노래할 때 담라우는 마치 갓 연애를 시작한 소녀의 모습으로 무대 위 계단에 앉아 남편의 노래를 들었고 소녀팬처럼 박수쳤다. 담라우는 남편의 노래에 화답하듯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고 남편은 무대에서 객석 1열로 내려가 관객들과 함께 부인의 노래를 들었다.

담라우는 푸치니 오페라 <잔니스키키>의 아리아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노래했다. 로맨틱한 음악과 달리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으면 강에 빠져 죽을 것”이라며 아버지를 협박하는 소녀 라우레타로 분장한 담라우는 정확한 피치로 가볍게 노래했다. 사랑에 빠진 라우레타 그대로였다.

두 성악가의 이중창에 이어 담라우는 안경을 썼다. 악보를 보며 우리 가곡 <동심초>를 노래했다. 가창에 대한 평가조차 허락하지 않는 듯 오페라의 여왕의 마지막 앙코르에 관객들은 기립박수와 환호로 열광했다.

오페라 반주 전문 악단의 소중함

첫 곡인 로시니의 오페라 <세미라미데> 서곡을 듣고 개인적으로 아쉬워 평소 알고 지낸 KBS교향악단의 관계자에게 연습 횟수를 물었다. 두 차례의 사전 연습(리딩)과 성악가와 함께 한 연습 단 한 차례라는 답변이었다.

실망스러웠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콜로라투라와 함께 하기엔 부족한 연습량이다. 악장의 보잉(활의 움직임)과 제1바이올린 가장 뒷 풀트에 앉은 연주자의 보잉을 비교해봤다. 활의 움직임이 절반에 불과했다. 마치 틀리지 않고 따라가기만 하겠다는 듯 말이다.

반면 푸치니 오페라 <잔니스키키>의 라우레타 아리아는 아주 좋았다. 평소 연주를 자주 해본 덕분일까. 어쨌든 프로그램 반주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독일에서 반한 루치아와 서울에서 재회한 노르마

두 아이의 엄마로, 생계형 부부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음악은 지금도 발전진행형이다. 담라우와 테스테는 다가오는 7월 스페인 페랄라다(Peralada)에서 <사랑의 노래(Canta L’amor)>라는 타이틀로 공연을 갖는다. 담라우 부부가 <오페라의 왕과 여왕>에 이어 준비한 사랑을 주제로 한 음악을 들고 언제쯤 우리를 다시 찾을 지 벌써 가슴이 설렌다.

2012년 베를린에서 루치아로 만난 담라우를 서울에서 노르마로 다시 만났다. 정말 반갑고, 즐거운 밤이었다.

조동균/ 한경아르떼필 사무국장·테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