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100세 헨리 키신저
타임지 표지 모델 21회, 노벨상 수상…. 20세기 세계 외교계의 거목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 얘기다. 1923년생인 키신저가 이달 27일 100세 생일을 맞는다. 2021년 101세로 별세한 조지 슐츠 전 국무부 장관에 이어 미 국무부 234년 역사상 두 번째로 100세 이상 생존자가 될 전망이다.

나치 박해를 피해 10대 때 가족을 따라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키신저의 인생 동력은 두 가지 욕망이었다. 하나는 대학 시절 옷차림·스포츠·연애와는 담을 쌓고 오로지 독서와 글쓰기에만 몰두한 지적 욕망, 또 하나는 현실 정치 세계를 향한 권력의지였다. 1950년 하버드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할 때 그의 학부 논문 분량은 388쪽이었다. 이후 하버드는 학부생 졸업 논문 분량을 140쪽 이내로 제한했다.

키신저는 하버드대 교수 때부터 끊임없이 입각을 꿈꿔 온 ‘원조 폴리페서’다. 그가 닉슨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공직을 시작한 계기는 엄밀히 말해 ‘배신’을 통해서였다. 민주당 존슨 정부의 베트남전 자문 역할을 했던 그는 판세가 공화당 후보인 닉슨에게 유리하게 돌아서자 비밀정보를 닉슨 선거팀에 누설하고 이후 그 공로로 중책을 맡았다.

키신저만큼 20세기 세계 질서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외교관도 찾기 힘들다.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통한 미·소 데탕트 조성, ‘죽의 장막’ 중국의 개방 유도, 페트로 달러 시스템을 구축한 이른바 ‘키신저 밀약’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 세계 외교가는 키신저의 무대였다.

영원한 ‘현실주의자’ 키신저의 냉철한 현실 분석은 100세를 앞두고도 여전하다. 얼마 전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3차 대전을 막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대화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분야로 AI(인공지능)를 꼽았다. 과거 미·소 간 핵 군축처럼 AI 군사력에 대한 억지가 전쟁의 파국을 막는 데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2021년 구글 전 회장 에릭 슈밋과 함께 쓴 책도 다. 키신저를 향한 단골 비난거리인 전쟁 배후 원흉, 군사독재 정권 지원 등도 뒤집어보면 미국의 국익과 맥이 닿아 있다.

우리에게도 키신저처럼 냉철하고 국익 제일주의의 탁월한 외교 책사가 절실한 때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