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벤 버냉키 전 미국중앙은행(Fed) 의장은 연신 고개를 떨궜다. 6일(현지시간)부터 8일까지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어스에서 열리는 '미국경제학회(AEA) 2023' 연례총회에서 일이다.

버냉키 전 의장이 고개를 숙인 건 본인이 Fed 의장이던 때 시행한 양적완화 때문은 아니다. 학문적 내용과 관련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성폭력 때문이다.

버냉키 전 의장 입장이 난처해진 건 지난해 버냉키 전 의장과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필립 디비그 워싱턴대 교수의 성추행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디비그 교수는 관련 사건으로 워싱턴대 조사를 받고 있다.

또 버냉키 전 의장은 2019년 AEA 회장이 된 뒤 AEA 역사상 처음으로 성차별 윤리 규정 위반 조치를 시행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유사한 일이 12건이 발생해 논란이 됐다. 여성 경제학자들의 절반 가량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여성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항의가 빗발쳤다. AEA는 지난해말 '경제학계의 성희롱 방지'라는 주제를 AEA 행사의 독립 세션으로 급히 추가했다.

버냉키 전 의장도 이 세션에 패널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Fed의 통화정책이나 인플레이션 관련 주제에 대해 발표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은 것이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데다 올해 행사의 큰 주제 중 하나가 Fed의 통화정책이어서 전직 Fed 의장인 버냉키의 발언이 갖는 무게감이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냉키 전 의장이 3년 만에 AEA에 참석해 본인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여서 개인적 의미도 남달랐다.

버냉키 전 의장은 이날 "우리는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협회가 가진 권한이 많지 않아 불행히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본인 발표를 마친 뒤 토론이 끝나기 전에 자리를 떴다. AEA는 문제 있는 회원에 대해 회원 자격을 박탈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을 통해 문제 당사자를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현재 AEA 회장을 맡고 있는 크리스티나 로머 UC버클리 교수는 이날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근본적이고 아주 중요한 문제"라며 "AEA 내의 위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추가 조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뉴올리언스=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