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투세 강행, 1% 겨냥하다가 99%가 피해본다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내년 1월부터 시행할 금융투자소득세(일명 금투세)를 놓고 여야 간 논쟁이 점입가경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현재 정부와 여당은 2년간 유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금투세 강행 입장을 고수하던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유예 시사 발언을 계기로 분위기가 변하다가 급기야는 정치적 명분을 얻기 위해 중재안을 내놓았다.

금투세는 주식, 채권, 펀드 투자로 거둔 1년간의 이익에서 손실을 뺀 순익 중 5000만원 초과분에 대해 22.5%, 3억원 초과분에 대해서는 27.5%를 징수한다는 것이 원안이다. 투자 손실액은 5년간 이월해 공제할 수 있도록 해 조세저항을 줄이려는 흔적이 있다. 이중과세 비판도 증권거래세를 단계적으로 인하하는 식으로 보완했다.

얼핏 보기에는 ‘소득이 있는 곳에 과세해야 한다’는 조세의 기본원칙에 맞는다. 금투세 법안을 발표하면서 내건 ‘금융세제 선진화’ 목표에도 부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유예 쪽으로 입장을 선회하면 ‘2024년에 치러질 총선에서 표를 의식하는 것이 아느냐’는 포퓰리즘 비판에 쉽게 동조할 수 있다.

하지만 금투세 속내용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유예해야 한다’는 입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과세의 기본원칙에 맞고 추진 목적이 정당성을 갖고 있더라도 의도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추진 여건이 중요하다. 한국은 소득 규모, 시가총액 등을 따질 때는 세계 10위 경제대국이지만 금융 면에서는 제도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후진국이다.

금투세 도입의 명분으로 내걸고 있는 ‘금융세제 선진화’는 ‘금융시장 선진화 과제’의 사후적 방안이다. 금융시장 참여자들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의 선진화가 더 급하고 중요하다. 사전과 사후 방안 간 우선순위가 뒤바뀌면 조세저항이 커지면서 증시는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와 비슷한 의도로 금투세를 도입한 대만의 경우 강행 한 달 만에 주가가 40% 폭락해 결국 정부가 백기 투항했다. ‘부동산 버블 붕괴’라는 특수한 요인이 겹쳤긴 했지만 일본도 강행 한 달 만에 주가가 60% 폭락했다. 두 국가의 공통점은 성급하게 강행했다가 실패함에 따라 금투세 도입이 더 멀어졌다는 점이다.

금투세율도 벤치마크국인 미국과 다르다. 한국은 금투세율을 순익액을 기준으로 누진적으로 부과하고 있으나 미국은 장단기로 구분해 장기투자를 유도하고 있다. 금투세 부과가 미국은 건전한 기업의 자금조달과 국민의 재산 증식 창구로서 증시 기능의 활성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반면에 한국은 ‘징수만을 겨냥했다’는 혹평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증시는 지배구조나 금융시장 제도의 허점으로 외국인의 파상 공세와 공매도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됐다. 오히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우대의 잘못된 윔블던 효과로 수많은 문제점을 알고 그대로 방치하는 과정에서 역차별당하는 우리 국민 입장에서 우리 증시는 만성병을 앓고 있는 중환자 시장이다.

우리 투자자가 우리 증시를 더 외면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뜩이나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상과 달러 강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무역적자가 커짐에 따라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추세다.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금투세를 강행한다면 우리 투자자가 미국으로 이탈하면서 제2 외환위기 우려가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임대차 3법도 입법 의도와 달리 서민들이 큰 피해를 봤듯이 금투세도 1%를 겨냥하다가 99%가 피해를 보는 정책 실패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 금투세 유예가 부자 감세라는 논리도 정치인 등이 주로 투자하는 사모펀드, 대체투자펀드 수익의 최고세율을 49%에서 27.5%로 내리는 것이 진짜 부자 감세다.

가구 인원수를 고려하면 3000만 명이 직간접적으로 증시와 연관이 있다. 금투세를 강행하는 정당은 2024년 총선에서 패배할 확률이 높다는 예상도 이 같은 근거에 따른 것이다. 입법의 정당성이 있더라도 추진 여건이 충족되지 못했다면 될 때까지 유예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 명분을 찾기 위해 조건식 유예를 전제로 한 중재안은 죽(징수)도 밥(금융세제 선진화)도 안 된다. 포퓰리즘 입법의 전형적인 사례로 2024년 총선에서 패배를 넘어 대패하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