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양상추 총리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5월, 정치권은 A4용지 2쪽짜리 메모로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안동수 당시 새천년민주당 서울 서초을지구당 위원장이 작성한 이른바 ‘충성 메모’ 파문이다. “가문의 영광인 중책을 맡겨주신 대통령님의 태산 같은 성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아첨성 문구로 시작해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탄핵감이 될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지구당의 한 직원이 사무실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이 메모를 장관 취임사로 알고 기자들에게 배포하는 바람에 일파만파가 돼 안 장관은 임명 43시간 만에 경질됐다. 그의 이틀간 장관 재직 급여는 47만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수령을 원치 않아 전액 국고 귀속됐다.

나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는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기 직전, 그의 후계자로 총리에 지명됐다. 그러나 총통 관저 인근까지 포위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5월 1일 괴벨스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독살한 후 자신들도 독약 앰풀을 깨물었다. 나치 친위대원들이 괴벨스 부부 시신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하루 총리 괴벨스’는 인류 평화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영국 총리 리즈 트러스가 취임 44일 만에 사임을 발표했다. 300년이 넘는 영국 내각책임제 역사상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 퇴진이다. 그는 짧은 재임 기간 본의 아니게 반면교사의 교훈을 남겼다. 73조원 규모의 감세정책을 섣불리 내놓았다가 세계 금융시장을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과정에서 정책 시기 조율과 효과 분석, 소통의 중요성, 지도자의 책임감, 진퇴현은(進退見隱)의 지혜에 대해 또 하나의 타산지석 사례가 됐다.

영국의 한 타블로이드 매체는 지난 14일부터 상온 상태의 양상추와 트러스 총리 중 어느 쪽이 더 오래 버티는지를 두고 내기를 하자며 양상추 모습을 유튜브로 생중계하며 트러스를 놀림감으로 삼았다.

‘Truss vs Lettuce’라는 언어유희도 담겨 있는 이 게임에서 트러스는 유통기한 10일짜리 양상추보다 먼저 시들고 말았다. 경솔하고 무책임하며 진퇴를 몰랐던 ‘양상추 총리’의 씁쓸한 퇴장이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