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인터뷰②] 일본 정부 표창받은 부용회 후원회장 안양로씨
일본 외무성이 지난해 8월20일 한일 간 우호·친선 관계를 증진했다는 공로로 한국인 4명과 한국 단체 1곳에 표창장을 줬다.

한일 간 상호 이해를 촉진했다는 이유였지만,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안양로(60) 부용회 후원회장. 그의 수상 사유는 '영사·이주사업 수행에 공헌'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 회장의 정체와 수상 사유가 궁금했다.

지난달 17일부터 세 차례 안 회장을 만났다.

-- 영사·이주사업 수행에 공헌했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 일제 강점기 전후에 조선인(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 여성들은 1963년 '재한 일본인 처(妻)의 모임'(현 부용회)을 만들었는데, 상당수는 한국이나 일본 정부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힘들게 살았다.

지난 1998년 '부용회 할머니'를 도우려고 '부용회 후원회'가 생겼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주한일본대사의 표창에 이어 외무상 표창까지 받았다.

-- 언제부터 부용회 할머니를 후원하게 됐나.

▲ (1998년 9월)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부용회 할머니를 위로하러 온 음악동호회 분들과 우연히 인연이 됐다.

-- 그때 안 회장은 무슨 일을 했나.

▲ (관광업계) 전문용어로는 '인 바운드'라고 하는데 외국인의 한국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에 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모든 걸 현장에서 처리하게 돼 있는데 그 단체(후쿠오카에서 온 음악동호회)는 음악을 하는 분들이라 악기를 많이 가지고 와서 공항에서부터 관광차 외에 화물차를 부탁하더라. 보라매공원(보라매 장애인복지회관)에서 공연했는데 공연 시작 전에 다과회도 하겠다고 하더라. 주문이 많기에 내가 현장도 살펴볼 겸 도움을 주려고 그때 방문을 하다 보니…
[연합인터뷰②] 일본 정부 표창받은 부용회 후원회장 안양로씨
안씨는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평범하게 반일 감정과 피해의식을 가진' 그였지만, 1988년 9월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부용회 할머니'의 슬픈 삶에 대해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 간다던 남편이 사라진 경우도 있었고, 총각인 줄 알았는데 애가 두셋 있는 유부남인 경우도 있었다더라. 그 당시 시어머니가 오죽했겠나.

아들이 공직에 있는 경우 일본 며느리가 혹시 무슨 피해라도 줄까 봐 엄청나게 구박했다더라."
"자식 때문에 숨죽인 채 살았는데 한일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때는 자식들에게 학대를 받기도 해서 결국 혼자서 외롭게 살아온 분들이 많더라. 3.1절이나 8.15 광복절 때 학교 가면 알려질 게 아닌가.

'일본 쪽발이 아들'이라며 느닷없이 때리니까.

맞고 오고 울고 오니까 그때는 학교를 아예 안 보냈다고 하더라."
"단지 한국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한 죄로 이렇게 숨소리 한마디 못 내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저도 굉장히 반성도 했고…엄청난 아픔을 간직한 위안부 할머니도 계시지만 그 반대로 역사에 그늘진 삶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고. 그 사실을 관광업계 지인들에게 알려서 후원회를 만들게 됐다.

"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한국은 그렇다 치고, 일본 정부는 왜 돕지 않은 걸까.

-- 이분들의 국적은.
▲ 한국 남자랑 결혼했지만 일본 국적이 정리가 안 된 분들도 있었고, 한국 국적만 있는 분들도 있었고, 이중국적인 분들도 있었다.

사실 이중국적은 불법인데 부용회 할머니들에게는 한국과 일본이 양해해준 게 아닌가 싶다.

-- 일본 정부의 지원은 없었나.

▲ 예전(1998년)에는 한 달에 4만∼5만원 정도 교통비를 드렸다더라. 그때는 한국 정부에서 주는 건 전혀 없었다.

최근 야마구치 마스에 할머니 (통장) 보니까 일본 정부가 3달에 146만원인가, 한 달에 47만∼48만원 정도를 드리더라. 한국 국적인 분들은 (한국에서) 노령 연금도 받고, (요양보호사가) 청소도 하고 목욕도 시켜주고 한다.

-- 일본에서는 왜 지원 안 했나.

▲ 한일관계 역사적 얽히고설킨 스토리가 많이 있다 보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도 있는데, 그 문제가 한일간에 완결이 안 됐는데, 일본 정부가 선뜻 여러 관계상 많이 도와주지 못한 것 같다.

'위안부 문제도 해결 안 됐는데 당신네 사람만 도와주냐'는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

일본 대사관도 고뇌를 많이 한 것 같다.

[연합인터뷰②] 일본 정부 표창받은 부용회 후원회장 안양로씨
1998년이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와중에 상대적으로 경기가 좋은 일본 관광객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때다.

외국인 관광객 유치가 외화 획득의 유력한 수단일 때라 '인 바운드' 여행업계의 목소리도 컸다.

1998∼2003년 외국인 유치 상품기획 실무자협의회(여우회) 회장을 지냈고, 2003년부터 '외국 관광객 유치 증진 시민연대'라는 단체의 사무총장을 맡은 안씨의 말에도 힘이 실릴 때였다.

여행업계 사람들을 중심으로 후원회원이 4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후원회에선 구체적으로 뭘 했나.

▲ 할머니들한테 뭐가 제일 필요하냐고 물어봤다.

물론 여유 있는 분들은 일본에 다녀오신 분들도 있었지만 생활이 열악한 분들은 18∼19살에 결혼해서 한 번도 못 가본 분들 있더라. 2000∼2004년까지 일 년에 두세 번씩, 총 100여명의 모국 방문을 도와드렸다.

일본 할머니들이다 보니까 온천을 좋아해서 일 년에 2번 정도 온양온천에 열차 타고 같이 도시락 먹으면서 노래방도 같이 가는 등 즐겁게 지냈다.

여기서 다시 궁금한 것 한가지.
'한국인 중에도 어려운 노인이 많은데, 하필 일본인 할머니를 돕느냐'며 이른바 '친일'이라고 비난하는 이는 없었을까.

"25년째 활동을 해오는 동안 방송 나가고, 신문에도 소개됐지만 한사람도 저한테 비난하고 왜 돕느냐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 국민도 수용하는 범위가 넓어졌고, 한국은 따뜻한 마음의 정서가 있지 않나.

(탤런트) 최불암 선생은 지인인 재일교포를 소개해줘서 부용회 일본 지부를 만들어 할머니들의 모국 방문을 돕기도 했다.

"
부용회 후원회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 5명을 틈틈이 돕는 한편, 관련 기록을 남기기 위해 관심 있는 학자 등과 협의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