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 것일까. 사람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동일한 행위를 할 때 이유는 하나다. 좋아하기 때문이다. 위험한 발상이긴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피눈물을 흘려놓고도 호모 사피엔스가 여전히 전쟁을 끊지 못하는 것은 그것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인간 세상에서 평화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며 오히려 전쟁이 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물론 영구 평화라는 자신의 주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사였겠지만 허위로 세상을 진단할 분이 아니라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분이 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철학서인 《전쟁론》을 집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유혈을 꺼리는 자는 그렇지 않은 자에 의해 반드시 정복당하며 전쟁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의 연속”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왜’라는 물음에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몰라서가 아니었다. 답을 하기가, 진실을 말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책 속에 암호처럼 숨겨놓은 정답은 ‘개인적인 의지’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정치가와 군인들의 의지가 클라우제비츠가 간파한 전쟁의 이유였다.

이처럼 철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전쟁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경제학적으로 전쟁을 설명하는 것은 허무할 정도로 쉽다. 거기에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익이 통상적인 경제 활동으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을 월등하게 뛰어넘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에서 이겼을 경우다. 지면 즐거움을 상대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 즐거움 중의 하나가 물질적·신체적인 약탈이다.

고대와 중세의 전쟁에서 약탈은 승리에 대한 포상이었다. 전투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폭등한 병사들의 혈기를 자연스럽게 점강(漸降)시키는 효과도 있었는데 보통은 사흘을 약탈 기간으로 허용했다. 그 이상으로 신나게 털다가는 한몫 두둑하게 챙긴 병사들이 탈영할 가능성이 있었고 과다한 약탈이 반감을 불러와 약탈 지역 주민들이 게릴라로 돌변하거나 다음 약탈 예정지의 사생결단 항전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 개인은 그렇게 보상받았다. 그럼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는 어떻게 이익을 취하나. 바로 배상금이다. 한마디로 병사들은 잔돈을 챙기고 국가는 목돈을 챙기겠다는 것으로 이는 꽤 오래된 전통이다.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가 맞붙은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이를 너무 빨리 갚아버리자 국력 회복 속도에 불안감을 느낀 로마가 트집을 잡아 카르타고를 지도에서 지워버린 일은 유명하다. 이처럼 불가피하게 벌어진 전쟁으로 배상금을 주고받는 경우와 달리 아예 처음부터 배상금을 노리고 전쟁을 벌인 사례도 있다. 대혁명 직후의 프랑스와 클라우제비츠가 평생을 두고 증오한 남자 나폴레옹이 그 주인공이다.
나폴레옹이 그의 마지막 열병식을 거행한 퐁텐블로성. 그는 근위대 병사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자신의 운명을 가여워하지 말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고 근위병들이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유배지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나폴레옹이 그의 마지막 열병식을 거행한 퐁텐블로성. 그는 근위대 병사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자신의 운명을 가여워하지 말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고 근위병들이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유배지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20세기 남북한의 지도자가 공통으로 존경했던 나폴레옹은 오리지널 프랑스인이 아니다(박정희야 같은 포병 장교 출신에 좌익 연루 사실까지 일체감을 느꼈다지만 김일성은 대체 왜?). 코르시카 출생이긴 했지만 나폴레옹은 엄밀히 따져 이탈리아 혈통이다. 코르시카는 14세기부터 제노바의 지배를 받았다. 얌전한 식민지가 아니었다. 반골 기질이 강한 섬사람들 아니랄까 이들은 틈만 나면 독립 무장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당시 제노바가 반란의 섬 코르시카를 통치하기 위해 파견한 주둔군 지휘관 가문 출신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주둔군이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빠르게 코르시카인과 동화됐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반란군 편에 서서 제노바와 싸웠다. 우리로 치면 조선총독부가 변절해 독립군과 연합해 싸운 꼴이다.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 전 제노바는 이 지긋지긋한 식민지를 프랑스에 팔아버린다.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제노바 대신 프랑스와 맞서 싸우는 처지가 됐지만 워낙에 환경친화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두 아들을 프랑스 본토에 유학 보낸다. 제노바가 골칫덩이 코르시카를 매각하지 않았더라면 유럽 역사에 나폴레옹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 동생과의 인연으로 암울한 시기를 보내던 나폴레옹은 왕당파의 반격을 분쇄하면서 기사회생한다. 대포로 반란군을 진압하는 그의 독보적인 재능은 경제 정책 실패와 인플레로 고심하던 혁명정부(국민공회)에 영감을 준다. 전쟁이었다. 더 정확히는 승전을 통한 배상금 획득으로, 전쟁으로 재정이 망가진 나라가 전쟁으로 재정을 확보하겠다는 역발상을 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괴멸시켰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배상금이 국민공회에 전해진다. 이 독창적인 재정 확보 전략은 100년 뒤 동양의 한 나라에서 재현된다. 근대화의 우등생 일본은 이 수법을 청나라에 써먹었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배상금을 뜯어내 재미를 본 끝에 러시아에서 재탕하려다 실패한다. 러시아는 자신들은 전쟁을 중단하는 것이지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의 배상금 요구를 거절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주장이 완성도가 떨어지는 이유다.

남정욱 작가·전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