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애국혼 기억" 백범 서거 73주기 추모식 거행
백범 김구 선생 제73주기 추모식이 26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렸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독립유공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박 처장은 추모사에서 "선생께서는 73년 전 오늘 흉탄에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오직 조국과 민족을 걱정하셨다"며 "백범 선생의 숭고한 애국혼을 기억하는 한 어떠한 위기와 도전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생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목표·모범이 되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박 처장은 "선생께서는 칠흑 같은 암흑의 시기에 한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우리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라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치신 선생 영전에 깊은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바친다"고 말했다.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4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싸웠으며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2월 일본인을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는 포고문을 길거리에 내걸었다.

이후 체포돼 1897년 7월 사형이 확정됐다가 광무황제 특명으로 사형 직전 집행정지령이 내려졌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준·이동녕 등과 함께 구국운동을 이끌었다.

1908년 독립지사들의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직후 공모 혐의를 받아 다시 투옥됐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선임된 이후 내무총장,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조국 자주독립에 헌신했다.

독립 이후인 1949년 6월 26일 개인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