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킹엄궁 앞 도로에 인파 가득, 사방에 유니언잭 나부껴
"평생 헌신에 존경, 영국인 하나로 모아줘" 한목소리…후대에는 의견 분분
[르포] "애국심이 솟아요" 영국 여왕 즉위 70주년 화려한 기념식
"평생 헌신한 여왕이 자랑스럽고 국기(유니언잭)가 멋지게 걸린 걸 보니 애국심이 솟아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플래티넘 주빌리'가 2일(현지시간) '군기분열식'(Trooping the Colour)을 첫 순서로 나흘 일정을 시작했다.

군기분열식은 영국 왕의 생일에 개최되는 260여년 전통 근위대 공식 축하 퍼레이드로, 이번엔 군인 1천400명, 군악대 400명, 말 200마리 등이 동원됐다.

이날 트래펄가 광장 주변에선 버킹엄궁으로 향하는 거대한 물결이 등장했다.

유니언잭을 들거나 몸에 두르고 배낭을 멘 차림이 대부분이지만 군기분열식 초청장을 갖고 화면에서나 보던 멋진 모자와 예복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지하철역 앞에선 유니언잭을 3파운드(4천700원)에 팔았다.

바로 옆에선 유니언잭 모양의 홍보물을 나눠줬다.

[르포] "애국심이 솟아요" 영국 여왕 즉위 70주년 화려한 기념식
트래펄가 광장 인근에서 버킹엄궁까지 이어지는 약 1㎞ 직선 도로 '더 몰'은 일찌감치 통제됐고 양옆 보도는 인파로 가득 차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군기분열식' 행사장에 들어가진 못해도 지나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온 것이다.

버킹엄궁 근처는 며칠 전부터 텐트를 치고 기다린 왕실 팬들이 선점했다.

친구와 함께 행사 시작 2시간여 전에 왔다는 60대 여성 브렌다씨는 "TV로 더 잘 보이겠지만 현장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며 "길이 막혀서 더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이날 오전 날씨는 화창하면서도 선선했고 사람들은 오래 서서 기다리면서도 밝고 설레는 표정이었다.

군기분열식에 참석하는 기병대, 군악대에 이어 왕실 가족들이 탄 마차가 지나가자 환호가 터져 나왔고 난동을 부리던 이들이 경찰에 끌려 나갈 때는 '우~' 하는 야유가 나왔다.

[르포] "애국심이 솟아요" 영국 여왕 즉위 70주년 화려한 기념식
그 밖에는 다들 질서 정연한 모습이었고 유모차와 휠체어 등도 지나갈 길이 생기곤 했다.

경찰과 안내요원들이 곳곳에 배치돼있긴 하지만 잡상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행사 후 퇴장하던 한 여성은 옆에 선 경찰에게 "오늘 수고에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행사장까지 온 이들은 기본적으로 여왕과 왕실에 호의적일 것이라고 전제하더라도 이날 영국인들의 태도에선 여왕을 향한 진심 어린 애정이 느껴졌다.

영국 남부 브라이튼에서 온 산드라씨 모녀는 "여왕을 존경한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국가 원수로서 개인을 뒤로 미루며 의무를 다했고, 온갖 일이 생기고 총리가 여럿 바뀌어도 바위처럼 계속 자리를 지켜줬다"고 답했다.

[르포] "애국심이 솟아요" 영국 여왕 즉위 70주년 화려한 기념식
비서로 일하다 4년 전 퇴직했다는 브렌다씨와 환경 단체에서 일한다는 앤씨는 여왕의 역할에 관해 "영국인들을 이렇게 모이게 하지 않느냐"며 "코로나19로 어려웠을 때 메시지를 내서 위로해줬으며, 외교적으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경제적으로도 관광객 유치 효과를 낸다"고 말했다.

이들은 "왕실이 없으면 자선단체들은 어려워질 수 있지만 영국 정치는 달라질 바가 없다.

그저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고 문화"라며 "해리 왕자의 부인 마클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유명인이 됐다는 생각만 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평생 헌신한 여왕이 자랑스럽고, 국기가 아름답게 휘날리는 것을 보니 애국심이 솟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윌리엄 왕세손이 대기하고 있으니 괜찮다거나 환경에 진지한 관심을 두고 업적도 많이 세웠다는가 하면 다이애나 일을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고 윌리엄 왕세손으로 바로 넘어가면 좋겠다는 답도 나왔다.

10대 남학생 알렉스는 "여왕은 전설이지만 왕자들은 멍청하다"고 말했다.

[르포] "애국심이 솟아요" 영국 여왕 즉위 70주년 화려한 기념식
물론 여왕을 그저 사랑하는 팬들도 있었다.

선덜랜드 지역에서 온 엘리자베스(70)씨 등 사촌, 조카 6명은 여왕 가면을 쓰고 유쾌하게 사진 촬영에 응했다.

10살 알리시아의 가족은 전날 버밍엄에서 왔다.

알리시아의 엄마 클레어씨는 10년 전 다이아몬드 주빌리 때 여왕이 지역을 방문했다가 딸에게 인사를 건네서 '주빌리 걸'이란 별명을 얻었다며 당시 사진을 보여줬다.

[르포] "애국심이 솟아요" 영국 여왕 즉위 70주년 화려한 기념식
군기분열식이 끝난 뒤 버킹엄궁으로 도로 돌아가는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말이 지나가는 진동과 군악대 연주가 흥을 고조시켰다.

경찰이 도로 통제를 풀자 사람들은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여왕 등 왕실 가족들이 인사하는 장면을 보려고 앞으로 몰려갔고 긴 도로가 까맣게 메워지는 장관이 나타났다.

이어 거대한 전투기 등이 낮게 날며 공중분열식을 하자 열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사방에 가득한 유니언잭과 여왕의 모습은 영국이 잘나가던 시절의 영화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와 코로나19로 갈라지고 움츠렸던 영국인들이 여왕을 구심점으로 삼아서 통합하게 되는 듯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잔치가 끝나면 에너지요금 등 물가 급등으로 인한 서민 고통과 경기 둔화라는 우울한 과제가 다시 대두될 것이다.

세금으로 호의호식하는 왕실을 향한 시선도 날카로워질 수 있다.

여왕 이후 왕실의 미래에 관한 논의도 본격화할 수 있다.

여왕 이외 가족들의 인기가 높지 않고 왕실 지지도는 점점 낮아지고 있으며 젊은 층일수록 더욱더 부정적이다.

전날 나온 유고브 설문조사에서는 100년 뒤에도 왕실이 있겠냐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이 41%로 그렇다(39%)를 넘어섰다.

10년 전엔 긍정이 60%, 부정이 26%였다.

[르포] "애국심이 솟아요" 영국 여왕 즉위 70주년 화려한 기념식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