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미필적 고의 인정" 유죄→2심 "고의 없어" 무죄 판결
"실명 확인 의무 소홀했던 건 사실…정도 걷기를" 충고
비대면 계좌개설 했다가 보이스피싱 공범으로 몰린 은행원
"재판부에서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정도(正道)를 걷지 않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이 발생하고 큰 피해가 따르는지 깨닫고, 앞으로는 정도를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실적향상 욕심에 비대면으로 외국인 명의 계좌를 개설해줬다가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된 은행원이 긴 법정 다툼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춘천지법 형사1부(김청미 부장판사)는 금융실명법 위반 방조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50)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고 28일 밝혔다.

A씨는 2018년 10월부터 2019년 2월까지 여권 사진만으로 중국인 명의 계좌를 개설해줬다가 해당 계좌가 보이스피싱 조직의 대포통장으로 쓰이면서 범행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1년 전 외국인 근로자들 계좌를 개설하면서 알게 된 B씨에게 영업실적 향상을 위해 신규 계좌를 개설할 외국인들이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가 공범으로 몰렸다.

A씨는 "고의가 없었다"며 무죄를 주장했으나 1심 재판부는 유죄로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은행에서만 약 30년간 근무하면서 부지점장에까지 오른 A씨가 비대면 계좌개설의 위험성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건 믿기 어렵다는 점 등을 근거로 A씨를 비롯해 함께 기소된 B씨 등 4명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비대면 계좌개설 했다가 보이스피싱 공범으로 몰린 은행원
홀로 판결에 불복한 A씨는 "범죄에 이용될 것을 몰랐고 다른 피고인들과 공모하지 않았다"며 또다시 무죄 주장을 폈다.

사건을 다시 살핀 항소심 재판부는 A씨가 보이스피싱 범행을 용이하게 하려는 고의가 있었다는 점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A씨가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알지 못했고 다른 피고인들이 조직원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대포통장을 개설하는 일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볼만한 증거나 사정도 발견할 수 없다고 봤다.

실명 확인 의무를 소홀히 한 건 사실이며 A씨도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범죄나 탈법행위에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는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범죄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이라는 점 등을 들어 판결을 뒤집었다.

김 부장판사는 선고공판에서 A씨에게 거듭 고민했음을 밝히며 "무죄로 결론을 냈지만 다른 견해가 있을 수도 있다.

앞으로는 정도를 걷기를 바란다"고 충고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