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서 27일까지 특별전…육조 위치·조직 소개
광화문 앞 '육조거리'로 살펴본 조선시대 관청과 관원 생활
경복궁 정문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인 '세종대로'는 조선시대에 '육조거리'라고 했다.

육조(六曹)는 중앙 관청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를 아우르는 용어다.

18세기 한양 모습을 그린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를 보면 광화문을 등지고 숭례문 쪽을 향했을 때 왼쪽에 최고 관청인 의정부를 필두로 이조, 한성부, 호조가 차례로 자리했다.

건너편에는 경복궁과 가까운 쪽부터 예조,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가 들어섰다.

해방 이후에도 육조거리는 주변에 정부청사가 세워지고, 경복궁 북쪽에 대통령이 머무는 청와대가 있어 행정 중심지로 인식됐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면 육조거리는 '정치 1번지'라는 수식어를 내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이 27일까지 여는 특별전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육조의 위치는 물론 조직 구성과 관원 생활상까지 상세하게 다룬 전시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로 살펴본 조선시대 관청과 관원 생활
최근 박물관에서 만난 김현영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1413년 도성 간선도로에 긴 행랑을 건설하면서 육조 관청들이 광화문 앞에 좌우로 길게 늘어서게 됐다"며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에 탔지만 육조 관청은 광해군 때 본래 위치에 복원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랫동안 경복궁이 비어 있었음에도 관청들이 위치를 지켰다는 사실은 육조거리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며 "육조 관청들은 창덕궁 주변에 임시 청사인 조방(朝房)과 당직처인 직방(直房)을 설치해 불편함을 해소했다"고 덧붙였다.

전시장에 입장하면 켜켜이 쌓인 토층을 통해 육조거리의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다.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새문안교회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뤄진 발굴조사 결과를 소개했는데, 아래쪽에서는 15세기 분청사기 접시 조각이 출토됐고 위쪽에서는 19세기 백자 접시가 나왔다.

중간층에서는 무기인 총통이나 동으로 제작한 촛대 등이 발견됐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로 살펴본 조선시대 관청과 관원 생활
관원 조직은 당상관(堂上官), 당하관(堂下官), 참하관(參下官)으로 나눠 설명했다.

당상관이 되려면 보통 문신은 정3품 통정대부, 무신도 정3품 절충장군 이상 품계를 지녀야 했다.

참하관은 종7품 아래였고, 당상관과 참하관 사이에 당하관이 있었다.

1785년 간행된 법전인 '대전통편'에 따르면 삼정승이 있는 의정부에는 당상관 7명, 당하관 3명, 참하관 1명 등 관원 11명이 배치됐다.

이들 아래에서 이속(吏屬) 107명이 근무했다.

육조 가운데 관원과 이속이 가장 많은 조직은 법률, 범죄 심리, 노비 관련 업무를 관장한 형조였다.

형조에는 관원 17명과 이속 203명을 합해 220명이 일했다.

반면 사람이 가장 적은 관청은 인사를 담당한 이조로, 관원 7명을 포함해 62명이 소속됐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로 살펴본 조선시대 관청과 관원 생활
관원들의 삶을 주제로 한 공간에서는 복식의 가슴이나 등에 붙이는 장식인 흉배(胸背)를 통해 당상관과 당하관 차이를 파악할 수 있다.

문신은 당상관 흉배에 학 두 마리를 수놓았으나, 당하관 흉배에는 학이 한 마리만 있었다.

1706년 자료인 이겸저 녹패(祿牌)에는 급료로 받을 쌀과 콩의 양이 기록됐다.

녹패는 일종의 급여 명세서였다.

김 연구사는 "종7품 이겸저는 쌀 13두와 콩 6두를 받았는데, 당시 3명이 한 달간 먹는 쌀이 9두 정도 됐다고 한다"며 "녹봉은 광흥창에 가서 직접 수령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단골리'라는 대리인이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관원 중에는 현대 직장인처럼 업무를 마치면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영조(재위 1724∼1776)는 음주를 경계해 금주령을 내렸다.

조선 후기 학자인 이범중이 1764년에 쓴 편지를 보면 "주금(酒禁·술을 금함)이 심해져 날마다 수색하기를 일삼으니 고생이 비할 데 없다"는 대목이 있어 술을 즐기기 녹록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육조거리 배후 지역에서는 술이 은밀히 유통됐다고 한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로 살펴본 조선시대 관청과 관원 생활
육조는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8개 '아문'으로 재편됐고, 육조거리에도 이 관청들이 들어섰다.

이근호 충남대 교수는 전시 도록에서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육조거리는 의례와 외교의 주요 공간으로 기능했으나, 일제 침략 이후에는 야만적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며 "근현대에도 질곡을 거치며 부침을 거듭했다"고 주장했다.

전시는 서울역사박물관이 국립고궁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함께 기획한 '광화문 600년: 세 가지 이야기' 중 하나다.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은 종료했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 '공간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광화문'은 31일 막을 내린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