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고양이들의 아파트'…재건축으로 터전 떠나는 길고양이 여정 담아
'고양이 천국' 아파트가 헐린다…250마리 길냥이 피난의 기록
깡마른 눈과 겁에 질린 눈빛, 주춤주춤 사람을 피해 도망가는 걸음걸이. 대개 길에서 마주치는 고양이들의 모습은 이렇다.

그런데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고양이들은 영 딴판이다.

사람을 보면 반가운 듯 종아리에 머리를 비벼대고 배를 뒤집기도 한다.

수년, 수십 년간 주민들의 돌봄을 받아온 덕에 반 집고양이가 됐다.

동네 약사 할아버지는 약을 지어 아픈 길냥이를 치료해주고 '캣맘'들은 사료와 간식을 챙긴다.

아이들은 고양이들을 불러내 장난감으로 놀아주며 함께 자란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고양이들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고양이 천국' 아파트가 헐린다…250마리 길냥이 피난의 기록
그러나 아파트 재건축 결정이 떨어지며 이곳에 사는 약 250마리의 고양이들이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주민들과 캣맘들은 '둔촌냥이' 모임을 만들어 고양이들을 다른 곳으로 안전하게 옮길 계획을 세운다.

정재은 감독은 2017년부터 2년 반 동안 둔촌주공아파트 고양이들의 피난 여정을 카메라에 담아 다큐멘터리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완성했다.

고양이를 단순히 인간의 귀염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도시 생태계 속에서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바라봤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동물의 공존, 나아가 '동반'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시 주거 공간의 역사와 생태를 성찰한 '말하는 건축가'(2012), '말하는 건축 시티:홀'(2014), '아파트 생태계'(2017)에 이어 정 감독의 네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다.

'고양이 천국' 아파트가 헐린다…250마리 길냥이 피난의 기록
'둔촌냥이' 회원들은 고양이들을 어떤 방법으로 이주시켜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격론 끝에 입양, 근거리 이주, 원거리 이주 세 가지 방법을 고안해낸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들의 지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고양이 개체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만만찮고, 잡는 것은 더 만만찮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가 낯선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도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다른 곳으로 옮겨놔도 위험천만한 철거 현장으로 돌아오고 마는 고양이들이 가장 큰 걱정거리다.

중장비가 도로를 헤집고 벽을 때려 부수는 전쟁터 같은 이곳이 '집'이라고 느끼는 고양이들. 한 회원은 "이곳에 진짜 살고 싶은 건지 물어보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고양이 천국' 아파트가 헐린다…250마리 길냥이 피난의 기록
둔촌주공아파트는 2020년 철거가 마무리됐다.

그곳에 살던 250마리의 고양이들도 함께 사라졌다.

이 순간에도 도시 곳곳의 다른 길고양이들 역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

한순간에 집을 잃고 헤매다 다른 고양이의 영역에 들어가는 바람에 싸움이 붙고, 먹을 것을 찾다 음식물 쓰레기를 뒤질 것이다.

운이 나쁘면 인간의 분풀이 대상이 돼 무참히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

누가 고양이들을 낯선 곳으로 몰아냈을까.

우리는 고양이들 아니 모두의 터전을 원래부터 우리의 소유였던 것인 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는 17일 개봉. 상영시간 88분. 전체관람가.

'고양이 천국' 아파트가 헐린다…250마리 길냥이 피난의 기록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