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에 뜬 화려한 옷, 욕망의 허무함을 말하다
세련된 여성용 트렌치 코트와 고급스러운 가죽 가방, 기품이 느껴지는 고운 빛깔의 한복, 단아한 흰 드레스와 빨간 구두…. 예쁘고 화려한 옷들이 몸도 마네킹도 없이 허공에 덩그러니 떠 있다. 마치 투명인간 모델이 옷을 입고 멋진 포즈를 취한 듯한 모습이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더욱 음산한 느낌을 주는 건 옷 위로 줄줄 흘러내리는 정체불명의 액체다. 현란한 옷 속에 숨겨진 현대인의 욕망과 공허함을 표현한 안창홍 작가(69)의 ‘유령패션’ 연작이다.

서울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안 작가 특별초대전 ‘유령패션’이 열리고 있다. 유령패션 유화와 조형 작품, 디지털 드로잉과 ‘마스크’ 연작 등 300여 점을 통해 그의 최근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에콰도르 수교 60주년 특별전 귀국전’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사비나미술관은 “지난해 11~12월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에콰도르 키토의 과야사민미술관에서 안 작가의 작품들을 전시해 현지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며 “이번 전시는 귀국 보고전”이라고 설명했다.

안 작가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뛰어난 실력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고,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회화와 조형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권력과 현대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한 그의 작품은 관객들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강렬한 감정을 선사한다는 평가다. 1980년대 초반 가족의 허상을 고발한 ‘가족사진’ 연작, 2009년 소시민들의 누드를 사실적으로 그린 ‘베드 카우치’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섭미술상, 이인성미술상, 부일미술대상 등을 받았다.

이번 전시에서 주를 이루는 작품은 지난해 작업한 유령패션 연작이다. 패션은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자본주의의 꽃이다. 그는 “인간의 유대관계가 단절된 도시에서 화려하게 물결치는 옷들이 공허한 허깨비처럼 느껴진 데서 영감을 얻었다”며 “거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인간의 육신 없이 옷만 돌아다니는 듯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작품 속의 옷 안에는 인간이 없고 허망한 욕망만 실체 없이 떠다니는 듯하다. 옷 위에 흐르는 액체는 불안정하고 허망한 욕망의 속성을 강조한다.

전시장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구현된 유령패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150여 점의 디지털 펜화 작품은 인터넷에 떠도는 패션 화보를 수집한 뒤 앱으로 그 사진을 지우고 덧붙여 그리는 작업을 반복해 완성했다. LG디스플레이의 협찬을 받아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스크린을 통해 선보였다. 29점의 유화 작품은 디지털 펜화 작품을 캔버스에 전신 크기로 옮긴 뒤 유화물감을 덧입혀 완성했다.

백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조형 작품 세 점이다. 섬유강화플라스틱(FRP)으로 옷의 형상을 만든 뒤 아크릴 물감을 칠했다. 안 작가는 “그림 속 의상 색의 느낌을 조형 작품 위에 살리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좋은 공부가 됐다”고 말했다.

2019년에 작업한 ‘마스크’ 연작 23점은 다양한 색을 칠한 가면 형태의 작품이다. 인간의 얼굴을 가리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내는 가면을 통해 개성의 상실과 군중심리, 사회의 억압 등을 표현했다. 코로나19 이후 일상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하게 된 지금 현실에서는 또 다른 시사점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전시는 5월 29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