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라 더 푸르고 푸른 라오스의 하늘

구름 한 점마저도 너무나 부끄러워

나뭇잎 뒤에 숨으려 사뿐사뿐 내려앉는다

구름다리 위로는 낮달의 한가로운 마실 걸음

영상 14도까지 새벽 수은주가 떨어지자

긴팔에 솜털모자까지 눌러쓴 강변의 사람들

마스크로 가린 입가에 김이 서린다

밤새 떨었는지 창백한 안색으로

햇살도 모시이불을 뒤집어쓴 채 나올 생각이 없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씨를 뿌리는

새들의 파란 속삭임들로 공원의 고요는 이식중이다
[K-VINA 칼럼] 공원의 어느 하루 (12월 라오스에서)
마른 야자수 가지가 구석구석 빗질하는 동안

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깨끗이 지워지고

서늘했던 시멘트 바닥들이 꿈틀꿈틀

능(원), 쏭(투), 삼(쓰리), 씨(포)에 맞춘 에어로빅 장단

거칠게 없이 흔들어대는 몸동작들

나이 뱃살을 복대로 칭칭 감아 돌리고

청춘을 부러워할 것 없이 타오르는 중년들의 열망

메콩강변 물안개도 덩달아 붉다

한쪽 길모퉁이에서는 새벽 간이 마켓이 열리고

갓 뽑아온 배추며 상추며 바나나며 열대식물과 과일들

금방 낚시 바늘에서 뽑아낸 잔 물고기들

아침 찬거리를 비닐봉지에 담아 달랑달랑

들고 가는 뒷덜미에 한보따리 햇살이 쏟아진다
[K-VINA 칼럼] 공원의 어느 하루 (12월 라오스에서)
언제나 정수리에 꽂히던 햇살이 겨울고개 너머로 살짝 누웠다

하지만 양은냄비뚜껑처럼 쉬이 뜨거워지는 열대지방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나온 지렁이들

슬리퍼 한 짝을 질질 끌고 다니며

터진 바짓가랑이를 걸쳐 입은 젊은 녀석이

살 오른 놈들만 골라 깡통에 주어담는다

공중화장실 옆에는 댓바람부터 맥주나발

아침부터 마셔야 제 맛이라는 듯이

비 싼 오줌발(공중화장실 이용료가 200원)을 참으며

구겨진 옷소매로 입가 거품을 쓱 닦아낸다

한 움큼 햇살이 사내의 바짓가랑이 속으로 들어가려다

찌든 군내 때문인지 엉거주춤 물러난다
[K-VINA 칼럼] 공원의 어느 하루 (12월 라오스에서)
한낮은 개들의 천국이다

목줄도 없는 주인 없는 개들이

아무데나 등을 베고 누워

알몸인 채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처질대로 처졌던 꼬리들도 바싹 힘이 들어갔다

보도블록 한켠을 차지하고 온 몸을 비틀며

뭐가 그리 좋은지 네발로 허공에 낙서를 하고 있다

인기척에도 아무 상관없다

묵혔던 빗물 때를 벗겨내듯 배를 마구 문지른다

뚜벅뚜벅 서너 마리 말들이 다가오자

마지못해 길을 내주고 기분이 상한 듯

말의 뒷구멍에 대고 사납게 짖어댄다

발길질 한방이면 중상도 가벼운데

그래도 자존심 때문인지 꽁무니를 빼면서도 앙탈이다
[K-VINA 칼럼] 공원의 어느 하루 (12월 라오스에서)
나무 그늘 아래 로또 간이 판매대가 즐비하다

월수금마다 로또 판매점은 아침부터 열린다

그늘이 없는 곳에는 해가림막을 치고

젊은 아가씨들이 로또를 팔고 있다

햇살을 올곧이 맞으며 파는 사람도 있다

판매금액의 20%까지 수익으로 챙길 수 있다고

판매대가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다

먹거리도 일거리도 사라진 코로나 세상

아저씨도 아주마도 모두 로또 판매에 나서고 있다

사람의 그림자도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손전등 하나 켜두고 우두커니 앉아있다

로또에 건 희망은 점점 늘어나는데

사람들의 호주머니는 점점 비어간다

로또 상점 앞에 우물쭈물 중년의 한 사내가

오토바이의 시커먼 연기만 호주머니에 남았는지

빈 지갑만 연신 털어내고 있다
[K-VINA 칼럼] 공원의 어느 하루 (12월 라오스에서)
5시만 되어도 해는 하루가 힘들다고

스멀스멀 메콩강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공원의 밤은 해가 넘어가기도 전에 온다

수 백 개의 포장마차에서 밝힌

붉은 전구가 어둠을 서둘러 부른다

밤마다 열리는 공원야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오일장처럼 없는 거 빼놓고 다 있다

코로나 확진자수가 최고치를 갈아치우는 이 와중에

1년 가까이 닫혀있던 야시장이 열리자

초반에는 사뭇 조심스러웠던 걸음들이 폭발하고 있다

구두며 옷이며 반지며 가방이며 시계며

천 냥 하우스처럼 값싼 물건들 천지다

단돈 천원이면 뭐든 고를 수 있는 옷가게가 인기몰이다

이 손 저 손 다 타서 헤질만한 옷가지

한 무리의 손님이 지나가자

또 한 무리의 손님이 와서는 똑 같이

구멍이 날 정도로 만져보고 들춰보고 간다

가게주인은 손뼉을 치며 다시 목청을 돋군다

처진 어께가 밤의 무게에 살짝 기댄다
[K-VINA 칼럼] 공원의 어느 하루 (12월 라오스에서)
강 언저리 넘어 흘러오는 노랫소리

베이스기타의 리드믹컬한 동남아 특유의 경쾌한 음률에

늑대와 함께 춤(Dances with Wolves, 1990)을 추듯

바람결에 날아갈 듯 걷는다

아직 이른 밤 8시

하지만 이미 달과 별은 강변 갈대밭에 호젓하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강 건너 태국에서는 저녁 종소리

12월이라 더 푸르고 푸른 라오스

신문지면은 온통 고속철도 개통 자랑거리지만

야시장에 설치된 붉은 포장마차에서는 술 대신

사람의 잔을 채우고

허기의 잔을 비우는

장터의 온기가 레온사인처럼 켜졌다 꺼졌다

오늘 하루도 힘들었는지

공원의 하루가 어둠 속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K-VINA 칼럼] 공원의 어느 하루 (12월 라오스에서)
칼럼 : 황의천 라오스증권거래소 C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