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 칼럼] 박진규 차관을 위한 변명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는 법에 규정돼 있긴 하다. “공무원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공직선거법 9조1항이 그것이다.

법이란 게 일종의 원칙을 정한 것이지만, 현실은 법보다 훨씬 복잡하다. 우선 정치가 필요해서 공무원을 선거에 이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단적인 사례 하나. 2012년 대선 때 박근혜를 당선시키는 데 기여했던 기초연금 공약에는 당시 기획재정부 예산실이 동원됐다. 기재부 출신 의원이 공약을 짜면서 예산실 후배들을 이용했고, 예산실은 과거에 그래왔듯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공약 재원 대책을 촘촘히 짜서 갖다바쳤다. 어차피 공무원이란 존재가 정권 입장에선 기술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용하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순 기술자이길 거부하는 공무원 입장에서도 거꾸로 자신이 원하는 정책 방향을 정치에 반영시키고 싶은 공직자로서의 소명의식이 있을 수 있다. 잘못된 정치로 정책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1차적인 피해를 입는 당사자가 바로 공무원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박진규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의 대선공약 발굴 지시가 ‘대선 줄대기’로 일방 매도되고 있는 건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궁금해 당시 박 차관이 주재한 1급 회의에서 무슨 얘기들이 오갔는지 탐문해봤다. 참석자들 얘기를 종합하면 박 차관의 문제의식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A씨에 따르면 “국회가 입법권을 사실상 독점하는 데다 산업부는 예산권도 없으니 중장기 관점에서 펴야 할 산업정책을 여야 가리지 않고 각 캠프 공약에 반영시켜 정책으로 입안이 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걸 언론이 ‘관가의 대선 줄대기’ 식의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보도하자 야당이 들고일어났고, 괜스레 오해받기 싫은 여당도 덩달아 공격했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나서 질책하고, 뒤늦게 선관위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씌워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마녀사냥식 몰이에 박 차관은 졸지에 ‘출세에 눈이 멀어 줄대기나 하는 나쁜 공무원’쯤으로 낙인이 찍혔다.

물론 박 차관이 정치권에 줄대기를 하려고 했다면 당연히 책임져야 마땅하다. 소속 부처의 이기주의를 위해 뛰려 했다 하더라도 똑같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여야 막론하고 정치권의 공약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실 이 정부 들어 유독 박해받은 산업부 입장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다. 에너지정책이 180도로 전환되면서 산업부가 입은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박 차관 주재 회의에 참석한 다른 1급 B씨는 “그런 트라우마 때문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측면이 컸을 것”이라고 했다.

한번 가정해보자. 2017년 대선 과정에서 섣불리 짜인 탈원전 공약이 전문 관료의 개입으로 바로잡혔더라면…. 5년 내내 경제에 부담을 준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 공약이 캠프 단계에서 고쳐졌더라면….

이번 대선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여야 대선후보 캠프가 공약 준비에 본격 착수했지만 실력있는 전문가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자리에 눈이 먼 교수나 시민단체 출신 중심으로 역대 최약체 정책공약단이 꾸려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전환적 공정성장’ 같은 실체를 알 수 없는 엉뚱한 공약이 나올 수밖에….

직업 공무원제가 없는 미국은 대선 캠프가 꾸려지면 각계 최고 전문가들로 구성해 공약을 만들고, 당선되면 그 최고 전문가들을 내각 주요 포스트로 기용한다. 시스템이 다른 우리로서는 정책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 집단이 바로 전문 직업관료다. 정책이란 게 현실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의 머리에서 뚝딱 만들어낸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걸 지난 5년간 우리는 지켜봐왔다. 관가의 대선 공약 발굴은 줄대기로 비난할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 장려해야 한다.